시(詩)/최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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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시(詩)/최갑수 2015. 6. 12. 09:22
아주 짧았던 순간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된 적이 있다 봄날이었다, 나는 창 밖을 지나는 한 여자를 보게 되었는데 개나리 꽃망울들이 햇빛 속으로 막 터져나오려 할 때였던가 햇빛들이 개나리 꽃망울들을 들쑤셔 같이 놀자고, 차나 한잔하자고 그 짧았던 순간 동안 나는 그만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서 아주 오랜 시간동안 그 여자를 사랑해왔던 것처럼 햇빛이 개나리 여린 꽃망울을 살짝 뒤집어 개나리의 노란 속살을 엿보려는 순간, 그 여자를 그만 사랑하게 되어서 그 후 몇 번의 계절이 바뀌고 몇 명의 여자들이 계절처럼 내 곁에 머물다 갔지만 아직까지 나는 그 여자를 못잊어 개나리꽃이 피어나던 그 무렵을 나는 못 잊어 그 봄날 그 순간처럼 오랫동안 창 밖을 내다보곤 하는 것인데 개나리 꽃이 피어도 그 여자는 지나가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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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 가포(歌浦)에서 보낸 며칠시(詩)/최갑수 2015. 6. 12. 09:09
한동안 가포에 있는 낡은 집에 가 있었다 늙은 내외만이 한 쌍의 말간 사기 그릇처럼 바람에 씻기며 살아가고 있는 바닷가 외딴집 바다 소리와 함께 그럭저럭 할 일 없이 보고 싶은 이 없이 참을 만했던 며칠 저녁이면 바람이 창문에 걸린 유리구슬 주렴 사이로 빨강 노랑 초록의 노을 몇 줌을 슬며시 뿌려주고 가기도 했다 손톱만한 내 작은 방에는 구름처럼 가벼운 추억 몇 편이 일렁이며 떠 있기도 했다 그 집에 머물던 며칠 동안 내 가슴속 아슴하게 오색 물무늬가 지던 그러한 며칠 동안 나는 사랑이라든가 사랑이 주는 괴로움이라든가 하는 마음의 허둥댐에 대하여 평온했고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그런 허둥댐의 덧없음에 대하여 다 돌아간 저녁의 해변처럼 심심해지면, 평상에 모로 누워 아슴아슴 귀를 팠다 오랫동안 곰곰이 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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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 밀물여인숙 1시(詩)/최갑수 2014. 10. 18. 20:19
더 춥다 1월과 2월은 언제나 저녁부터 시작되고 그 언저리 불도 들지 않는 방 외진 몸과 외진 몸 사이 하루에도 몇 번씩 높은 물이랑이 친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집 나선 지 이태째라는 참머리 계집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부서진 손톱으로 달을 새긴다 장판 깊이 박히는 수많은 달 외항을 헤매이는 고동소리가 아련하게 문턱까지 밀리고 자거라, 깨지 말고 꼭꼭 자거라 불 끄고 설움도 끄고 집도 절도 없는 마음 하나 더 단정히 머리 빗으며 창밖 어둠을 이마까지 당겨 덮는다 (그림 : 차일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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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 밀물여인숙 2시(詩)/최갑수 2014. 10. 18. 20:12
바다가 밤을 밀며 성큼 뭍으로 손을 내밀고 아낙들이 서둘러 아이들을 부른다 겨울밤은 폐선의 흔들림을 감당하기에도 벅차고 내 잠을 밀고 촘촘히 올라오는 잡어떼 별처럼 삼십촉 백열구가 떴다 아직도 잠들지 못한 걸까, 홑이불 속 사고 싶은 것이 많다는 그 여자도 따라 뒤척인다 뒤척인 자리마다 모래알들이 힘없이 구르고 곧 허물어질 것만 같은 등 나는 입술을 대고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러본다 그 여자의 등이 조금씩 지워진다 어느 땐가 내가 서 있었던 해변과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해보던 사납던 그 밤도 지워진다 여자의 등에 소슬하게 바람이 일고 만져줄까, 하얗게 거품을 무는 그녀의 얇은 허리와 하루종일 창문을 벗어나지 못하는 섬 집이 없는 사내들이 모서리 한 켠씩을 차지해 저마다 낮은 어깨를 누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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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 밀물여인숙 3시(詩)/최갑수 2014. 10. 18. 20:11
창밖을 보다 말고 여자는 가슴을 헤친다 섬처럼 튀어오른 상처들 젖꽃판 위로 쓰윽 빈배가 지나고 그 여자, 한 움큼 알약을 털어넣는다 만져봐요 나를 버텨주고 있는 것들, 몽롱하게 여자는 말한다 네 몸을 빌려 한 계절 꽃피다 갈 수 있을까 몸 가득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을까, 와르르 세간을 적시는 궂은 비가 내리고 때 묻은 커튼 뒤 백일홍은 몸을 추스른다 그 여자도 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애처로운 등을 한 채 우리가 이곳에 왜 오는지를 비가 비를 몰고 다니는 자정 근처 섬 사이 섬 사이 두엇 갈매기는 날고 밀물 여인숙 조용히 밀물이 들 때마다 (그림 : 차일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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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 밀물여인숙 4시(詩)/최갑수 2014. 10. 18. 20:00
목련이 진다 봄밤, 지는 목련을 바라보다 그 여자도 따라 진다 사랑에 헤프고 눈물에 헤프고 가르랑 가르랑 실없는 웃음에도 헤픈 그 여자 문패도 번지수도 없이 언제나 젖가락 장단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그 여자 목련 떄문이야 꽃 진 자리가 안타까워 짓무른 속눈썹을 떼어내는 손톱만한 그 여자 사랑이나 하자꾸나 맨몸으로 하면 되는 거 하고 나서 씁쓸하게 웃어버리면 되는 그런 거 어느새 달은 떠올라 고요히 창문을 엿보고 봄밤, 목련이 진다 두근두근 목련이 진다 (그림 : 임갑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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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 신포동시(詩)/최갑수 2014. 10. 18. 19:00
가을밤 눈이 감기지 않았다 집어등도 이따금 파도에 끊기고 적적한 골목을 내다니는 것이 내 유일한 고단함인 양 어깨를 기울이고 문 밖으로 나서면 느티나무들이 소리내어 손가락을 꺾고 있었다 게처럼 짝짝거리며 하현이 가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바람이 잔잔히 별을 애무할 때 여자들은 온몸으로 일생(一生)을 반짝이며 방파제 너머로 가느다란 웃음을 던졌다 가을은 이곳에도 깊이 들었구나, 아무도 잠들지 않는 자정의 거리 한차례 소란스러운 비가 훑고 지난 뒤 커튼을 닫고 사내들은 조용히 숨을 들었다 놓았다 나는 왜 뜨겁게 달아오르지 못하는가, 노랗게 불을 흔들며 나를 희롱하는 창문과 되돌려지지 않는 걸음 사이로 수런거리며 안개가 모여들었다 밤에게 엿보이는 내 헐한 가슴에는 시시때때 알지 못할 이름을 외우는 목청이 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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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 버드나무 선창시(詩)/최갑수 2014. 10. 18. 18:38
창문을 열면 바다만이 맹렬했다 오직 바다만이 간절했다 아랫도리를 벗은 채 아이들은 줄지어 선창을 달려가고 유리창마다 달라붙은 눅눅한 어항의 불빛들 휴일을 함께 지낸 사내들을 보내며 여자들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서둘러 화장을 고쳤다 막막한 봄밤 소리치면 툭, 하고 끊어질 것만 같은 수평선 숨죽여 뱃고동이 울고 달뜬 숨소리 내뱉으며 버드나무들은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서러운 몸을 씻었다 무엇일까, 우리를 밤새 깨어있게 만드는 비린 냄새의 그것들은 무엇일까, 창문을 닫고 누우면 커다란 눈을 가진 심해어들이 환하게 불을 밝힌 채 나의 뜨거운 얼굴을 향해 꼬리치며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바다에 괴롭고 삶에 괴로운 서글픈 눈매의 까까머리 청년이었다 (그림 : 김성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