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최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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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 11월시(詩)/최갑수 2019. 9. 15. 11:23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 앉아 오래 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십일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밖의 소리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속같은 십일월의 그 햇빛들이 머물렀던 자리 십일월의 바람은 또 불어와 시(詩) 몇편을 슬렁슬렁 읽어 내리고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 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 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시구(詩句)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 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한 십일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갸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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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 석양리(石陽里)시(詩)/최갑수 2019. 9. 15. 11:21
비빌 데 없는 내 젊은 날의 구름들을 불러다 왁자지껄 모래밭에 앉히고 하늘 한켠에서 일박이일(一泊二日)로 민박하는 초저녁달에게 근대화슈퍼 가는귀먹은 할머니한테 가서 진로소주 몇 병 받아오게 하고 깍두기도 한 종지 얻어오게 하고 그런 날 저녁 외롭고 가난한 나의 어느 날 저녁 남해 한 귀퉁이 섬마을에서 바람이 나를 데리러 왔다가는 해당화가 피었대, 엽서만 전해 주고 그냥 돌아간 후 마을회관 옥상에 놓인 풍향계는 격렬하게 어스름 쪽을 가리키고 어디까지 왔나, 밤하늘은 금세 온갖 외로움들로 글썽거리고 (그림 : 전봉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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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 창가의 버드나무시(詩)/최갑수 2017. 12. 12. 20:38
세월은 또 내게 어떤 모양의 달을 보여주려나, 누군가 먹다 남은 달 차마 하지 못한 말 눈 내리는 창가에 앉아 그 여자 화투패를 뜹니다 공산(空山)에 명월(明月)이라 기다리지 않아도 님이 온다. 식어버린 톱밥 난로 옆 그믐처럼 눈을 내리깔고서 그 여자, 좋았던 시절을 생각합니다 호오호오 입김을 불어가며 유리창 위 뜻 모를 글자를 새깁니다 나도 한때는 연분홍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지는 꽃을 막을 수야 있나, 바람이 불고 또 바람이 불고 겨울이 깊어도 그 여자의 등뒤는 닳고 닳은 봄 색이 바랜 꽃무늬 벽지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낡은 탁자 위 그 여자가 놓아둔 공산에는 어느새 눈물이 한 점 보름달처럼 환하게 떠올라 있습니다 (그림 : 안창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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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 오후만 있던 수요일시(詩)/최갑수 2015. 6. 12. 10:46
수요일 오후 내내 바람이 불었다 네쪽으로 내어놓은 창문에는 세월처럼 빠르게 구름만이 흘러서 가고 이따금씩 행려병자의 먼 눈빛처럼 햇빛이 잠시 창틀에 머물렀다 나는 네가 떠난 후 늘 그러하였듯이 너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일과 더불어 나의 안부를 전하는 일을 긴 긴 낮잠으로 대신했다 구름은 무슨 정처없음으로 닿을 곳도 없이 흘러서 흘러서만 가는가 그리고 햇빛은 무슨 애처로움으로 오후를 서성대다 저녁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가 잠에서 깨면 창 밖은 어두운 겨울 들판 네가 떠나간 겨울 들판 차가운 적막과 적막 그 깊은 사이에는 내 외로움의 높은 미루나무 한 그루가 쑥 쑥 소리도 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림 : 한순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