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양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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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규 - 수국(水菊)시(詩)/양문규 2014. 2. 28. 13:22
물방울이 물방울을 꿰어 꽃을 피우고 있다 하얀 꽃, 물 바구니가 제 생긴 모습 그대로 물기를 머금은 채 겹겹 달빛을 비틀어 매고 물의 꿈을 꾼다 머언 바다 하늘에 묻혀 있는 흰 구름, 검은 돌탑을 스치고 물 바구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바람은 매양 절 속에서 나래를 접고 깊은 숨쉬기를 한다 모든 것들의 울음으로 마르지 않는, 물의 꿈을 몸 속에 가둔다 대웅전 위에 얹혀 있는 큰 산 하나 자정 너머 마지막 달빛을 쓸어안고 적묵당(寂黙堂) 돌담 옆, 꽃나무 속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림 : 노숙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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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규 - 영국사에는 범종(梵鐘)이 없다시(詩)/양문규 2014. 2. 28. 13:18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산과 산 사이로 낮게 구름이 흘러가고 바람 속을 종소리 대신 소똥 묻은 새가 울고 간다 스님은 심장을 드러내고 계곡물 소리를 듣는다 서로 가는 것을 묻지 않고, 길이 끝나는 곳으로부터 소리들이 되돌아와 발 디디는 곳마다 종을 울린다 물은 흘러가는 것을 묻지 않고 계속 흐른다 마음속의 관음觀音 종소리 아닌 종이 운다 절 밖 아름드리 은행나무, 큰 울음 나뭇등걸 속에 내장한 채 하늘을 떠받들고 서 있다 (그림 : 김병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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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규 - 화골 사람들시(詩)/양문규 2014. 2. 28. 13:00
천태산 너머 화골 조팝나무꽃 지천이다 골짜기 따라 산날망까지 하얗다 화골 사람들 보릿고개 때에는 피죽 한 대접 제대로 먹지 못하고 죽어 나자빠져 장사 지냈다던 골짜기 눈물바다 십리가 꽃길 십리가 되었다 포원진 쌀, 쌀밥 맘껏 드세요 조팝나무꽃 쌀 잔치 연다 전도 부치고 돼지머리도 올리고 막걸리도 돌린다, 산동네 꽃동네 쌀꽃이라 노래 부른다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 모판 보리 이랑 가득 하얀 꽃, 이장 면장 군수도 잔을 올린다 둠벙 개구리들도 개굴개굴 축문을 읽는다 쌀농사 잘 되었습니다 내년에는 아랫마을 길곡 새뱅 동곡리 지나 우리 마을에도 조팝나무꽃 무성할거다 산날망 : 산마루(충북) 천태산 : 충북영동 ,영국사가 있어 부처의 지혜로 하늘과 같이 길이 편안함을 누리라"는 뜻에서 천태산이라 하였다 (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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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규 - 겨울이었다시(詩)/양문규 2014. 2. 28. 12:58
윗방 수숫대 통가리에 고구마가 들어 있었다 뒤뜰 장독대 옆 배가 불룩한 구덩이 속에는 무가 가득하였다 곳간 시렁에는 분이 듬성듬성 난 감 껍질이 소쿠리에 수북하였다 다섯 식구 겨울양식이었다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새끼를 꽜다 방등이 사이로 빠져나온 새끼줄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버지가 꼬아 놓은 새끼줄로 어머니와 누이는 가마니를 짰다 차가운 겨울이 거친 가마니 한 장에 덮여버렸다 동생과 나는 딱지치기를 하다가 물컹하게 삶은 고구마를 동치미와 곁들여 먹었다 살짝 얼은 무를 깎아 먹고 무 방귀를 수시로 뀌면서 코를 막았다 감 껍질을 먹다가 하얀 분이 묻은 손가락을 빨아먹었다 손가락을 빨 때마다 아랫마을 점방 알록달록한 눈깔사탕이 간절하였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웃집 개가 눈을 밟으며 짖어댔다 세상을 밝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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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규 - 시래깃국시(詩)/양문규 2014. 2. 23. 16:08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겨울은 점점 깊어가고 잔바람에도 뚝뚝 살을 내려놓는 늙은 감나무 열락과 고통이 눈 속으로 젖어드는 늦은 저녁 아버지와 시래깃국에 밥 말아 먹는다 세상 어떤 국이 얼룩진 자국 한 점 남김없이 지워낼 수 있을까 푸른 빛깔과 향기로 맑게 피어날 수 있을까 또 다른 어떤 국이 자잘한 행복으로 밥상에 오를 수 있을까 저렇게 부자간의 사랑 오롯이 지켜낼 수 있을까 어느 때라도 “시래깃국” 하고 부르면 일흔이 한참 넘은 아버지와 쉰을 갓 넘긴 아들이 아무런 통증 없이 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마주앉아 있으리라 세상은 시리고도 따뜻한 것이라고 내 가족 이웃들과 함께 함박눈을 밟고 겨울 들판을 휑하니 다녀와서 시래깃국 한 사발에 또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진 : 반석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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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규 - 참 유식한 중생시(詩)/양문규 2014. 1. 20. 11:45
밤새 천년 은행나무가 노오랗다 툭, 툭, 툭 흔들리는 바람을 타고 은행이 떨어진다 삼신바위 날다람쥐 삼단폭포를 기어올라 은행나무로 가는 길 쇠말뚝 타고 흐르다 그만 미끄러져 가시 철망에 피 흘린다 망탑봉 박새 한숨에 다랑이논 지나 은행나무에 닿으려 하지만 장대 그물망에 걸려 퍼득거린다 어느 구멍으로 들어왔는지 검은 차광막에 걸려 넘어진 남고개 고라니 누가 천년 은행나무 옥살이를 시키나 주절주절하는 사이 은행(銀杏)이 은행(銀行)인 것도 모르는 무식한 놈들이라며 소유경(所有經) 썰(說)하는 천태산 부리부리(不二不二) 너구리 낼 모레면 상강 지나 벼랑길인데 은행똥보다 더 독한 구린내 풍기는 참 유식한 중생 (그림 : 김병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