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손세실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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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세상에서 가장 슬픈 욕시(詩)/손세실리아 2015. 4. 21. 14:00
막 삶아 건진 수육과 탁주 한 말 마을 회관에 들이던 날 필시 입막음용일 게라고 사람들은 속닥거렸다 집주인 박목수가 전기세 물세 똥세를 터무니없이 물려도 조목조목 셈하지 못했고 깔깔이 맞춤 원피스 품이 솔거나 장날 산 태양초에 희나리가 근 반쯤 섞여 있어도 첫 휴가 나왔다가 구대 날짜 넘겨버린 외아들을 고발할까 두려워 따지지 못했다 방범대원 호각소리 유난히 긴 밤이었던가 잔술 팔아 모은 뭉칫돈 쥐어주며 빌어먹더라도 대처로 나가라고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겟느냐고 순경한테 붙잡히면 끝장이니 시비 거는 놈 있거든 무조건 져주고 파출소나 검문소 근처는 행여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하루를 살더라도 사람같이 살아보라고 등 떠밀고 돌아와 그 길로 곧장 박목수 멱살 잡아 공과금 되돌려 받고 실밥 터진 원피스 다시 재단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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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곰국 끓이던 날시(詩)/손세실리아 2015. 4. 21. 13:32
노모의 칠순잔치 부조 고맙다며 후배가 사골 세트를 사왔다 도막난 뼈에서 기름 발라내고 하루 반나절을 내리 고았으나 틉틉한 국물이 우러나지 않아 단골 정육점에 물어보니 물어보나마나 암소란다 새끼 몇 배 낳아 젖 빨리다보니 몸피는 밭아 야위고 육질은 질겨져 고기 값이 황소 절반밖에 안되고 뼈도 구멍이 숭숭 뚫려 우러날 게 없단다 그랬구나 평생 장승처럼 눕지도 않고 피붙이 지켜온 어머니 저렇듯 온전했던 한 생을 나 식빵 속처럼 파먹고 살아온 거였구나 그 불면의 충혈된 동공까지도 나 쪼아먹고 살았구나 뼛속까지 갉아먹고도 모자라 한 방울 수액까지 짜내 목축이며 살아왔구나 희멀건 국물, 엄마의 뿌연 눈물이었구나 (그림 : 김경렬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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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욕타임시(詩)/손세실리아 2015. 4. 21. 13:22
오천 평 농장일도 척척 중증 치매 시아버지 병 수발도 척척 종갓집 외며느리 역할도 척척인 여자가 있다 곱상한 외모와 왜소한 체구만 보면 손 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 것 같은데 일일 노동량이 상머슴 저리 가라다 그 정도면 신세 한탄으로 땅이 꺼질 법도 한데 볼 때마다 환하다 생색내는 법 없다 슬쩍 비결을 물었다 궁금하나? 하모 내만의 비법이 있재 내도 인간인데 와 안 힘들겠노 참다참다 꼭지 돌믄 똥차로 냅다 뛰는 기라 거기서 싸잡아 딥다 욕을 퍼붓는 기지 나가 느그 집 종년이가 뭐가 떠받들어도 살지 말찐데 주둥이만 열믄 뭔노무 불만이 그리 많노? 그리 잘하믄 늬 누이들이랑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모시지 와 내한테 미루는데? 욕만 하는 줄 아나? 쏙이 후련해질 때까지 고함치고 삿대질도 한다카이 그라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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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물오리 일가(一家)시(詩)/손세실리아 2014. 11. 13. 15:23
호수공원 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때마침 그 밑을 지나던 물오리 一家를 만났습니다 어미가 앞장 서 갈퀴발로 터놓은 물의 길을 여남은 마리의 새끼들이 올망졸망 뒤쫓고 있습니다 떼로 몰려다니며 수선스러워 보이지만 묵언정진 중인 수련 꽃잎에 생채기내는 일없고 빽빽한 수풀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니는 듯 보이지만 물풀의 줄기 한 가닥 다치는 법 없이 말짱한 것이 하늘에 길을 트고 국경을 넘나드는 철새들의 비행과 별반 다를 바 없었는데요 왜 유독 사람이 다녀간 길 언저리에는 상처가 남는지 꽃 지고 새소리 멎어 온통 황폐해지고 마는지 (그림 : 전운영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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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통한다는 말시(詩)/손세실리아 2014. 11. 11. 11:39
통한다는 말, 이 말처럼 사람을 단박에 기분 좋게 만드는 말도 드물지 두고두고 가슴 설레게 하는 말 또한 드물지 그 속엔 어디로든 막힘 없이 들고나는 자유로운 영혼과 흐르는 눈물 닦아주는 위로의 손길이 담겨 있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도 통한다 하고 물과 바람과 공기의 순환도 통한다 하지 않던가 거기 깃든 순정한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사랑해야지 통한다는 말, 이 말처럼 늑골이 통째로 묵지근해지는 연민의 말도 드물지 갑갑한 숨통 툭 터 모두를 살려내는 말 또한 드물지 (그림 : 성하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