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손세실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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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곰소댁시(詩)/손세실리아 2014. 10. 29. 16:01
고등어 배 갈라 속 긁어내는데 단 몇 초도 안 걸린다는 곰소댁 낭창거리는 칼날이 그 여자 잰 칼질의 이력이라는데 뱃놈 시절엔 계집질로 뭉칫돈 탕진하고 말년엔 노가다 십장질로 알탕갈탕 번 돈 노름방에 홀랑 갖다 바친 서방 덕에 새새틈틈 갈라진 손으로 등 푸른 어육의 배를 째고 물컹한 내장 그악스레 훑는다는 수협 공판장 일용직 잡부 곰소댁 하루도 질 날 없는 멍꽃에 신신파스 도배하듯 붙이며 "조강지처는 맷구럭, 첩은 좆구럭 " 구시렁거리다 재차 쥐어 박힌다는 그 여자 넋두리엔 소금기만 간간하다는데 빈속에 해장이라도 한 잔 걸칠 양이면 야속함도 탓함도 싹 잊어버리고 침 발라 헤아린 일당 단단히 챙겨 집으로 직행한다는 맹하고 선한 곰소댁 휘어진 등, 곱은 손! (그림 : 장천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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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올레, 그 여자시(詩)/손세실리아 2014. 9. 14. 13:03
숨을 데가 필요했던 게지 맺힌 설움 토로할 품이 필요했던 게지 절대가치라 여겼던 것들로부터 상처받고 더러는 깊이 배신당해 이룬 것 죄다 회색도시에 부려놓고 본향으로 도망쳐와 산목숨 차마 어쩌지 못하고 미친 듯 홀린 듯 오름이며 밭담이며 등대 이정표 삼고 바닷바람 앞장세워 휘적휘적 쏘다니다 설움 꾸들꾸들해질 즈음 덜컥 길닦이 자청하고 나선 여자 처처 순례객들 길잡이가 된 여자 그러다 정작 자신만의 오소록한 성소 다 내주고 서귀포 시장통 명숙상회 골방으로 되돌아온 여자 설문대할망의 현신이니 여전사니 말들 하지만 알고 보면 폭설 속 키 작은 애기동백 같은 여자 너울 이는 망망바다 바위섬 같은 그 여자 밭담 : 제주 지역에서 돌을 이용하여 밭의 가장자리를 쌓은 담. 돌을 이용하여 밭의 경계를 구분 지었던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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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저문 산에 꽃燈 하나 내걸다시(詩)/손세실리아 2013. 12. 10. 12:39
산을 내려오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늙은 나무의 흰 뼈와 바람에 쪼여 깡치만 남은 샛길이 세상으로 난 출구를 닫아걸고 있습니다 아직은 사위가 침침하지만 곧 사방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들겠지요 그렇다고 산에 갇힐까 염려는 마세요 설마 그러기야 할라구요 또 그런들 어쩌겠어요 혹시 보이시는지 점자를 더듬는 소경처럼 빛이 아물어야만 판독 가능한 저 내밀한 것들의 아우성 말입니다 밤하늘을 저공 비행하는 반딧불이의 뜨거운 몸통과 흐르지 못하고 서성이는 시린 산그늘, 팥배나무 잎맥에 파인 바람의 지문과 억겁을 휘돌아 식물의 육신을 빌려 짓무른 환부를 째고 해산한 꽃잎 끈 눈물 같은 사리 한알 내 안의 오래된 상처도 푸르고 곱게 부식되어 다음 생엔 부디 이마 말간 꽃으로 환생하시기를 삼가 합장 또 합장하며 저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