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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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일요일 아침 아홉시에는시(詩)/박지웅 2017. 11. 7. 18:03
일요일 아침 아홉시에는 무단횡단을 하고 싶다 그래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 마음이 초록불 빨간불 끄고 이편저편으로 다가가면 좋겠다 일요일 아침 아홉시에는 도로 수십 킬로미터가 맑은 여울로 바뀌면 좋겠다 바지 둥둥 걷고 들어가 은어 낚시를 하면 좋겠다 낚아챈 은어를 어영부영 다 놓치면 좋겠다 일요일 아침 아홉시에는 묶여 있던 개들이 모두 풀리면 좋겠다 갇혀 있던 새들이 동네 빵집으로 날아들면 좋겠다 펄쩍 뛰는 웃음소리로 아수라장이 되면 좋겠다 일요일에는 신문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 마음이 마음만 펼쳐 읽었으면 좋겠다 우체통에 키스로 봉한 편지가 꽂혀 있으면 좋겠다 그래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 일요일 아침 아홉시에는 큰 솥에 잔치국수를 삶다가 펑펑 울고 싶다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아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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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어깨 너머라는 말은시(詩)/박지웅 2017. 6. 17. 09:58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아무 힘 들이지 않고 문질러 보는 어깨너머라는 말 누구도 쫓아내지 않고 쫓겨나지 않는 아주 넓은 말 매달리지도 붙들지도 않고 그저 끔벅끔벅 앉아 있다 훌훌 날아가도 누구 하나 모르는 깃털 같은 말 먼먼 구름의 어깨너머 달마냥 은근한 말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은은한가 봄이 흰 눈썹으로 벚나무 어깨에 앉아 있는 말 유모차를 보드랍게 밀며 한 걸음 한 걸음 저승에 내려놓는 노인 걸음만치 느린 말 앞선 개울물 어깨너머 뒤따라 흐르는 물결의 말 풀들이 바람 따라 서로 어깨너머 춤추듯 편하게 섬기다 때로 하품처럼 떠나면 그뿐인 말 들이닥칠 일도 매섭게 마주칠 일도 없이 어깨너머는 그저 다가가 천천히 익히는 말 뒤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아주 닮아 가는 말 다르지 않아도 마음결에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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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푸른 글씨시(詩)/박지웅 2016. 12. 7. 17:39
언 강물 위에 사랑한다 쓴 글씨 날이 풀리자 사랑은 떠났다 한때 강변을 찾았으나 강은 늘 빈집이었다 그 푸른 대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다 어느 기스락에서 패랭이를 만나 패랭이꽃을 낳고 진달래와 한 살림 붉게 차리고 살다 그 꽃들 다 두고 어디로 가는가 객지에서 그대를 잃고 나 느린 소처럼 강변을 거닐다 혓바닥을 꺼내어 강물의 손등을 핥곤 했다 저문 강에 발을 얹으면 물의 기왓장들이 물속으로 떨어져 흘러가는 저녁 이렇게 젖어서 해안으로 가는 것인가 세상의 모든 객지에는 강물이 흐르고 그리하여 먼먼 신새벽 안개로 흰 자작나무 숲 지나 구름으로 아흔아홉 재 넘어 돌아가는 것인가 저문 강은 말없이 서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강은 언제나 옛날로 흘러간다 기스락 (명사) : 1. 기슭의 가장자리. 2. 초가의 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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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발목시(詩)/박지웅 2016. 7. 20. 21:57
발목은 자란다 길 끝에서 잘라 버린 것은 어느 날엔가 돌아오는 것이다 생시보다 더 생시 같은 헛것의 힘으로 내 앞에 부들거리며 서는 것이다 넘보아선 안 될 떨어져도 갔어야 할 그 길에 나는 한 묶음 붉은 발목을 버렸다 그 후 나는 어지러운 슬픔을 안고 수십 갈래의 길들을 떠돌았으니 돌아서 저녁 짓는 아낙같이 生은 나와 눈 맞추는 일이 드물었다 발목은 자란다 길 끝에서 잘라 버린 것은 어느 날엔가 돌아오는 것이다 오래된 슬픔이 건장한 靑年으로 자라 듯 느리고 느린 속도로 녹두같이 선명한 생명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숨을 멈추지만 나는 들킨다 그것은 결코 헛것이 아니었음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나는 휘청거린다 발목 젖힌 채 걸어오은 저 서늘한 청년(靑年)의, 기필코 그 주인을 찾아오는 내 혈육의 뼈, 그 저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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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30 cm시(詩)/박지웅 2015. 11. 18. 18:13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거리,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거리, 눈빛이 흔들리면 반드시 들키는 거리, 기어이 마음이 동하는 거리, 눈시울을 만나는 최초의 거리, 심장 소리가 전해지는 최후의 거리, 눈망울마저 사라지고 눈빛만 남는 거리, 눈에서 가장 빛나는 별까지의 거리,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거리, 눈 감고 있어도 볼 수 있는 거리, 숨결이 숨결을 겨우 버티는 거리, 키스에서 한 걸음도 남지 않은 거리, 이 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누가 30cm 안에 들어온다면 그곳을 고스란히 내어준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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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순두부에 박수를 보내다시(詩)/박지웅 2015. 6. 15. 00:25
순두부에 속을 데였다 마음놓고 넘기다 제대로 걸린 것인데 얼마나 야무지게 뜨거운지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다 맷돌에 갈리고 포장되고 삶기며 이 순두부는 몇 번을 죽었다 죽을 때마다 그 부글부글 끓던 속사정 나는 오늘에야 절절히 배우고 순두부는 결코 순한 놈이 아니라고 내 어린 연인에게 떠들어대고 말랑해도 말랑하게 볼 수 없는, 목숨 아홉에 속을 알 수 없는, 불여우 같은 순두부를 뜨며 뭉개질 대로 뭉개진 몸으로도 뜨거운 맛 한번 보여준 순두부의 외유내강 그 꼬장꼬장한 힘을 경탄하며 속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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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나비를 읽는 법시(詩)/박지웅 2014. 7. 6. 20:24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가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動詞)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그림 : 노숙자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