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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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가축의 정신시(詩)/박지웅 2014. 1. 20. 11:56
소 팔아 상경한 아비가 소처럼 일하고 돌아온 저녁 그림자가 뒤로 천천히 길어지더니 무거운 쟁기처럼 땅에 박히었다 앞장선 아비를 따라 우리는 여물통 같은 한강에 입을 처박았다 그곳에 모인 소 무리를 둘러보며 아비는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하거라 너는 커서 소가 되면 안 된다 그 한 마디에 마음이 모였다가 돌멩이 맞은 듯 퍼져 나가곤 했다 쓸쓸한 마음이 몸을 부비면 가슴이 시리다는 것을 알았다 한 입 뜯으면 강은 또 묵묵히 우리 입 앞에 여물을 채워놓았다 시린 네 개의 무릎을 가슴 안에 끌어넣어 데우던 아비의 밤 아비는 가축의 정신으로 우리 가족을 먹여살렸으니 한강의 기적을 일군 소들과 함께 이제쯤 인간의 국경으로 들어갔으리라 코뚜레를 벗고 어느 전생의 저녁에 대하여 쓰는 밤 아비가 죽을 때까지 나는 정체를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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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냇물 전화기시(詩)/박지웅 2014. 1. 20. 11:56
냇물에 던진 전화기, 한번 몸을 뒤집더니 물고기처럼 달아난다 지느러미를 가진 언어들이여, 잘 가라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날 이후, 귀로 들어온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지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고 흘러오고 흘러가는 것에 무심했다 가끔 발신처를 알 수 없는 문자를 받았다 물로 오랫동안 다듬은 문장이었다 생의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기까지 모은 이야기는 아름다웠으며 그 문장을 손바닥에 받아 마시는 일이 즐거움이었다 다시 한동안 잊고 살았다 남쪽 섬 언덕에 앉아 봄꽃이 마을 담벼락에 들어가 앉는 것을 보았고 금빛은빛 물결에서 나비들이 태어나고 또 꽃까지 당도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울고 싶었지만 잊었다 머나먼 아카시아 숲속을 걷다가 비늘 같은 것들이 사르르 머리 위로 내려앉을 때 나뭇잎 위로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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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매미가 울면 절판된다시(詩)/박지웅 2013. 12. 5. 09:29
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 배짱 한번 두둑하다 아예 울음으로 동네 하나 통째 걸어 잠근다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 도무지 없다 붙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읽는 것이다 칠 년 만에 받은 목숨 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것이다 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 매미가 울면 그 나무는 절판된다 말리지 마라 불씨 하나 나무에 떨어졌다 (그림 : 안호범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