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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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 땅 위를 기어가는 것들에는시(詩)/김영남 2014. 11. 25. 11:53
땅을 기어가는 것들에는 기둥에 붙들어맬 수 없는 고집이 있다. 황토밭을 달리다가 잠시 뒤돌아보는 고구마 순, 벽을 기어오르며 허공에 내미는 담쟁이손, 이것들에게는 허리가 꺾이고 발목이 묶이더라도 오로지 가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근성이 무섭도록 꿈틀댄다. 그 구불구불한 줄기를 들치면 대나무 뿌리 같은 손이 있고, 그 손 속에 들녘으로 나가는 어머니 호미자루가 쥐어져 있다. 꺾인 자리를 지우며 푸른 하늘을 향해 날개 펴는 새순 속에는 또 얘야, 손발이 부르트도록 땅을 뒤져 네게 올려주마 하시던 고무 신발 같은 말씀이 달리고 있고, 주렁주렁 열매 달린 묵은 순 속에는 딱딱한 매듭으로 남거나 삭정이로 부러지는 줄기의 마지막 모습이 아프게 숨어 있다. 땅을 기어가는 것들, 절벽을 기어오르는 줄기들에는 어둔 싹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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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 푸른 밤의 여로시(詩)/김영남 2014. 11. 13. 19:56
-강진에서 마량까지 둥글다는 건 슬픈 거야.슬퍼서 둥글어지기도 하지만 저 보름달을 한번 품어보아라. 품고서 가을 한가운데 서 봐라. 푸른 밤을 푸르게 가야 한다는 건 또 얼마나 슬픈 거고 내가 나를 아름 답게 잠재워야 하는 모습이냐. 그동안 난 이런 밤의 옥수수 잎도, 옥수수 잎에 붙어 우는 한 마리의 풀벌레도 되지 못했구나. 여기에서 나는 어머니를 매단 저 둥근 사상과 함께 강진의 밤을 걷는다, 강진을 떠나 칠량을 거쳐 코스모스와 만조의 밤안개를 데리고 걷는다, '무진기행'은 칠량의 전망대에 맡겨두고 내 부질없는 詩와 담뱃불만 데리고 걷는다. 걷다가 도요지 대구에서 추억의 손을 꺼내 보름달 같은 청자항아릴 하나 빚어 누구의 뜨락에 놓고 난 박처럼 푸른 눈을 욕심껏 떠본다. 구두가 미리 알고 걸음을 멈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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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 백열등을 위로해 주세요시(詩)/김영남 2014. 10. 8. 22:57
몇 병의 소주와 안주가 오가고 그의 앞날과 위로가 오가다가 이내 얼굴이 백열등처럼 달아오르면 그는 꼭 던진다, 그의 회사를 박살을 내야 속이 후련해질 컵처럼…… 나는 그의 회사를 정중하게 받아놓고 나의 회사로 바꿔서 그에게 던진다 그러면 그는 또 어느새 시골로 내려가 그의 학창 시절, 아버지, 어머니…… 고향까지 마구 찌그러뜨려서 던진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찌그러진 그의 고향을 반듯하게 펴 응수한다 신통하다 이렇게 치열하게 던져도 절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가끔 포장마차에서 펼치는 그와 나의 투수전 오늘도 새벽 4시가 응원하러 나오고 우린 또 수천 와트의 백열등을 그 허름한 경기장에 매달아놓고 귀가한다 그는 따뜻한 남쪽으로, 난 싸늘한 북쪽으로. (그림 : 오상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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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 그리운 옛집시(詩)/김영남 2014. 10. 8. 22:47
옛집은 누구에게나 다 있네. 있지 않으면 그곳으로 향하는 비포장 길이라도 남아 있네. 팽나무가 멀리까지 마중나오고, 코스모스가 양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는 길. 그 길에는 다리, 개울, 언덕, 앵두나무 등이 연결되어 있어서 길을 잡아당기면 고구마 줄기처럼 이것들이 줄줄이 매달려 나오네. 문패는 허름하게 변해 있고, 울타리는 아주 초라하게 쓰러져 있어야만 옛집이 아름답게 보인다네. 거기에는 잔주름 같은 거미줄과 무성한 세월, 잡초들도 언제나 제 목소리보다 더 크게 자리잡고 있어서 이를 조용히 걷어내고 있으면 옛날이 훨씬 더 선명하게 보인다네. 그 시절의 장독대, 창문, 뒤란, 웃음소리.... 그러나 다시는 수리할 수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집. 눈이 내리면 더욱 그리워지는 집. 그리운 옛집. 어느 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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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 가을이 우리를 재촉하고 있다시(詩)/김영남 2014. 10. 8. 22:42
이제 그만 툭툭 자리를 털고 돌아갈 채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가을이 문턱에서 가볍게 노크해 올 때. 대지는 한여름의 열을 뿜고 초록은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간에 우리는 벌떡 일어나 풀어논 생각들을 서둘러 거두어야 한다. 한결 부드럽게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불어와 창(窓)들을 끝없이 열어놓고 대문 바깥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모든 것들이 새로운 출발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다. 들녘도 새로운 손님들을 마중나가는 시간, 이런 시간, 이런 지점에 갇혀 우리는 언제까지 취하여 있을 수는 없다. 다음 계절에 지각하기 전에 아쉬운 기억들이 옷깃을 잡아도 우리는 곤충처럼 눈을 부릅뜨고 등불을 하나씩 붙들고 깨어 있어야만 한다. 문턱 앞에는 벌써 한 송이 국화가 우리에게 가을을 온몸으로 던져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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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시(詩)/김영남 2014. 10. 8. 22:39
만약 어느 여자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숲속 길이 있다면 난 그녀와 살림을, 다시 차리겠네. 개울이 오묘한 그녀에게 소리가 나는 자갈길을 깔아주고 군데군데 돌무덤을 예쁘게 쌓겠네. 아침이면 노란 새소리로 풀꽃들을 깨우고 낮에는 이깔나무 잎으로 하늘을 경작하다가 천마봉 노을로 저녁밥을 짓겠네. 가을이 되면 물론 나는 삽살개 한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며 쓸쓸한 상상을 나뭇가지 끝가지 뜨겁게 펼치겠지만 모두 떠나버린 겨울에는 그녀를 더 쓸쓸하게 하겠지? 그러나 난 그녀를 끝까지 지키는 장사송(長沙松)으로 눈을 얹고 진흥굴 앞에서 한겨울을 품위 있게 나겠네. 설혹 그녀에게 가파른 절벽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나는 그 위에 저렇게 귀여운 암자를 옥동자처럼 낳고 살 것이네. (그림 : 김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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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 '아줌마'라는 말은시(詩)/김영남 2014. 10. 8. 22:38
일단 무겁고 뚱뚱하게 들린다. 아무 옷이나 색깔에도 잘 어울리고 치마에 밥풀이 묻어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은 낯설어하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이 '아줌마'하고 부르면 낯익은 얼굴이 뒤돌아본다. 그런 얼굴들이 매일매일 시장, 식당, 미장원에서 부산히 움직이다가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짓는다. 그렇다고 그 얼굴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함부로 다루면 요즘에는 집을 팽 나가버린다. 나갔다하면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폭탄이 된다. 유도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진 못하겠지만 뭉툭한 모습으로도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이웃 아저씨도 그걸 드럼통으로 여기고 두드렸다가 집이 완전히 날아 가버린 적 있다. 우리 집에서도 아버지가 고렇게 두드린 적 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한번도 터지지 않았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