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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 거울이 없으면 감옥이 아니지시(詩)/시(詩) 2022. 6. 28. 14:21
아주 가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가도
엄마는 내 한복판으로 온다
엄마가 말했다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라고, 그러나 다시 떠나야 한다고
이제 이름을 바꾸고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 말해주었지만 그곳이 어딘지
가본 곳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거울로 비춰지지 않는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
엄마는 어딘가 변한 모습
조용해진 건가 했더니 무정한 모습
잠적에서는 이런 냄새가 나는가
나는 거울에 혀를 대본다
엄마는 다른 가정에서 살다 보면 이렇게 비밀이 많아
진다고
귀찮은 새들도 귀찮은 빗방울도 다 상대하다가 와야
한다고
엄마는 내 목구멍으로 말하면서도 어딘가 나를 사랑
하지 않는 모습
이제 다른 집으로 시집간 것 같은 모습
나는 이제 끈 떨어진 연
나는 생기를 잃은 생선 대가리
나는 꿈꾸어지듯 움직인다
거울이 없으면 여기가 감옥은 아니지
거울엔 퇴짜당한 내 얼굴
나는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는 날은
거울에 대고 비명을 비춰본다
그러다 엄마가 오면 거울의 스위치가 탈칵 내려가고
불이 꺼지는 기분
나는 종알거린다. 얼른 가세요 그 집에서 알면 어떡해요
천사가 이럴까. 천사는 다른 데 시집가면서
아이를 제 손으로 입양 보낸 엄마 같은 마음을 가졌을까
천사는 몸에 슬픔과 후회 같은 나쁜 균이 하나도 없어서
거울에 비춰지지 않는 얼굴을 가졌을까
지금 나에게 오로라 가루를 물속에 휘저어놓은 것 같
은 저 얼굴이
같이 떠나자 하지 않으니 다행일까
돌아온 엄마는 내 앞에 있어도 3인칭이 되어버린 자태
풍랑도 치지 않는 현관에서 조난당할 것처럼
망원경을 쓰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
빗속에 물감이 번지듯 번져버린 두 다리
백치로 태어난 새의 꿈에서 뛰쳐나온 듯
이 세상에 나를 매일 태어나게 하더니 이제는 본인이
매일 태어납니다
(그림 : 서정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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