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와연 - 한 되들이 술주전자시(詩)/시(詩) 2022. 2. 7. 11:23
몇십 년을 퍼마시면 저렇게 입이 헐까 손잡이는 겨우 찌그러진 몸
통에 걸려 있다 필시 술자리에서 여러 번 소매 잡혀 끌려간 흔적이
다 잔으로 먹고 말로 푸는 허세 아닌 허세가 누렇게 변해 있다
술주전자가 끓어 넘친 적은 없지만 술은 수시로 끓어 넘친다 그
끓어 넘치는 술주전자 속은 다 우그러져 있다 밖에서 들어간 흠은
안쪽에 두드러지지만 안에서 우그러진 부분으로 밖으로 나온 흔적이
없다 술을 부을 때마다 화끈거렸을 속,
나는 한 되짜리 막걸리 주전자를 들었던 시간으로 컸고 아버지 그
주전자 기다리는 시간으로 늙었다 아버지 술심부름 시켜놓고 수십
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듯 문 밖을 들락날락했다 막걸리 한 되
로 찰랑거리는 주전자 그 주량으로 세상 다 흘렸다
부글거리는 술,
주전자 안에서는 한 번도 발효된 적 없다
깊은 잠을 잔 적도 없다
그 주전자 오래 되다 보면
술 없이도 안에서 부글거리며 발효되는 것들이 있다
집안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버지처럼 노란 주전자는 없다
(그림 : 김영민 화백)
'시(詩) >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미 - 감 (0) 2022.02.09 최규환 - 오래된 습관 (0) 2022.02.09 유하 - 느림 (0) 2022.02.07 나병춘 - 화간(花間) (0) 2022.02.06 조운 - 오랑캐꽃 (0) 202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