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윤후 - 우리라는 덩이시(詩)/시(詩) 2021. 8. 13. 09:40
택배가 왔다
여러 겹 둘러친 끈을 가위로 자르려다 문득,
그녀의 밭을 생각해본다
저녁해가 찰박거리던 이랑 속에서
한 올 한 올 안으로 매듭지었을 고구마들
자줏빛으로 속알거린다
산다는 게 뒤슬러 놓은 것만 같아
이사를 하고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두 바뀌었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잘 지어진 인연은 풀어지지 않는다며
물어물어 연락했다던 그녀
나도 언젠가 마음 졸인 적 있었을까
감정이 서로에 갈마들어
미움이나 후회나 질투 따위가
여러 겹 두르고 둘렀던 그때
그녀는 어떻게 미소로 빙긋 풀었을까
관계는 자르는 것만이 아니라 끌러야한다고
흙 묻은 몇 개를 추려본다
어쩌면 고구마도 웅숭깊은 끈이었는지 몰라
이 매듭에 우리가 홀맺힐 수 있다니
먼 훗날 서로가 풀씨 되었을 때
궁금한 햇빛에게 성긴 구름에게
어떤 배경이 될 수 있을까
택배 한 상자가 트럭에서 흔들리면서
또 흔들리면서 내게 왔을
이 엮음,
나는 가만히 전홧줄을 당겨보는 것이다
(그림 : 김재성 화백)
'시(詩) >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중동 - 한밤중에 그네 타기 (0) 2021.08.14 권애숙 - 부추꽃 피던 날 (0) 2021.08.14 김명이 - 산책 (0) 2021.08.13 남재만 - 꼬부랑 할머니 (0) 2021.08.12 황길엽 - 가벼워지기 (0) 2021.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