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동 - 한밤중에 그네 타기시(詩)/시(詩) 2021. 8. 14. 12:39
밤이면 놀이터로 내려가 그네를 흔들어 깨워요
낮과는 다른 중력을 안고 그네는 시동을 걸죠
목적지를 말하지 않아도 그네는 속력을 내기 시작하고
후진기어를 넣는가 싶더니 그대로 달려나가요
바퀴도 목적지도 없는 그네가 나의 유일한 놀잇감이죠
그네가 아파트 숲을 휙 돌아 허공으로 오르고
목줄을 쥔 옆집 여자가 애완견에 끌려 문을 나서고 있군요
피아노를 짊어진 위층 여자는 낑낑대며 주방을 요리하네요
그 아래층의 내 방 불빛도 희미하게 비치네요
거미가 망사커튼을 치고 늦은 저녁상을 차리나 봐요
방의 주인이 바뀌어 버린 걸까요
난 거미랑 룸 쉐어링 계약을 하지 않았는데요
그네를 타기 시작한 다섯 살 무렵부터 그네는 알았을까요
내가 청년이 되면 밤에만 그네를 탄다는 사실을요
곰삭은 태양은 물러서 맛이 없어요
바람기 많은 구름은 애인이 될 수 없잖아요
그네가 갑자기 수직 상승을 시작하네요
캄캄한 하늘에 어릴 적 구슬들이 반짝이고 있어요
내가 갖고 싶던 구슬들은 주머니에 다 넣을 수가 없었어요
친구들이 하나둘 내 뒤를 따르는 걸 보면
아직도 야행성 친구들이 많은가 봐요
흔들리는 꿈들이 세상에 파다하게 퍼진 걸까요
한바탕 밤하늘을 돌고 나면 기분은 최고가 되죠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잠 속으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하늘의 보석들은 점점 빛을 잃어 가네요
내 방의 거미를 내보내야 하는데 어쩌죠
거미는 내 방의 창문이 유일한 놀이터인 줄 아나 봐요
(그림 : 고찬규 화백)
'시(詩) >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재철 - 생각은 새와 같아서 (0) 2021.08.15 황규관 - 밥 (0) 2021.08.15 권애숙 - 부추꽃 피던 날 (0) 2021.08.14 방윤후 - 우리라는 덩이 (0) 2021.08.13 김명이 - 산책 (0) 2021.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