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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소 - 폭설의 하루시(詩)/시(詩) 2021. 3. 6. 17:04
새벽이 여명을 내밀 즈음
눈발은 거리로 스며들어요
닫힌 문들이 열리면 분주한 행렬이 시작되죠
밤새 내린 눈은 땅을 업고
더 단단해지려고 고른 숨을 쉬어요
어디나 공평의 룰을 따르는 눈송이들,
퍼즐처럼 빈틈을 찾아 메울 때
출근길은 자꾸 멀리 달아나요
공장이나 연구실, 작업실 창문도 환한 조각이 되고
24시간이 판에 짜인 것처럼 부속이 되는 사람들,
식당에 걸어놓은 외상 장부 같은 쓸쓸한 하루가 밀리면
꿈은 또 얼마의 거래에서 허용될까요
흥정하다 되돌리는 실속 없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하늘은 눈발 빽빽한 흰 잣대로 이들을 재고 있어요
저마다의 능력을, 저마다의 시름을,
계단을 먼저 내려간 전철에는 옴짝달싹 못할 몸들로 가득하죠
차창의 무표정이 무표정을 스캔하고 있어요
쌓인 눈은 햇볕이 들면 서서히 발자국을 지우죠
녹아가는 눈이 부셔도 사람들은 사각 안에 또 불빛을 밝혀요
번쩍이는 현기증, 그 속에 숨겨진 허다한 일들
그것은 폭설 탓이 아니라 겨울이 되어버린 마음 탓이래요
그런데, 눈이 다시 내려요
이 하루도 안녕이라고
오늘의 역사는 적설량으로 기록되고
반성은 우리의 안팎에서 다시 문들을 접어요
(그림 : 박승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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