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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영 - 세상의 모든 밥시(詩)/시(詩) 2020. 9. 30. 14:03
혼자서 찬밥을 먹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밥 종류가 무척이나 많다
고봉밥 국밥 햅쌀밥 잿밥 된밥 이밥 약밥 쌀밥 고두밥 제삿밥 보리밥 콩밥 까마귀밥 맨밥 더운밥 진밥
잿밥 주먹밥 김밥 눌은밥 눈칫밥 까치밥 따로국밥 식은밥 개밥 기름밥 짬밥 오곡밥 장국밥 팥밥 좁쌀밥
소나기밥 불공밥 주먹밥 개밥 한솥밥 절밥 헛제삿밥.....
이것 말고도 수십 가지는 더 있을 듯한데
밥이 희망이 되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소금물에 볍씨를 띄울 즈음
잘디 잔 흰 꽃을 쌀밥처럼 매단 조팝나무가
지천으로 산기슭에 꽃을 피우면
해거름에 허기진 하얀 밤이 어느새 오고
마을 어귀 이팝나무도 내가 질세라
흰 쌀밥 같은 꽃을 잎새 위에 가득 얹었다
막 지어낸 하얀 밥을 사발에 퍼담다가
손가락에 묻은 밥알을 입으로 떼어먹으시며
정성으로 쌓아주던 고봉밥은
밥상 위에 하얗게 핀 조팝나무, 이팝나무 꽃 무더기
어머니의 환한 미소로 피었다
혼자서 찬밥을 먹다가
살강 위에 삼베보자기 들추고 꺼내 먹던
보리밥 생각에 목이 메이고
여기저기서 먹었던 눈칫밥에 마음 서러워지고
부모님 제삿밥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무리 찬밥이라도
뜨거워지지 않고 되는 밥이 어디 있던가
세상의 모든 밥은
뜨거움 속에서 익은 것이다.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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