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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나는 지금도 그 뜰에 가고 싶다시(詩)/송경동 2020. 9. 19. 18:30
리어카보관소가 있는 종묘 담 끼고 돌아
싼 밥집 모퉁이 이층
불교달력을 만들던 하꼬방 인쇄소
찬바람 일 때면 중절모 스님들이 티 몇 잔 불러두고
다방 아가씨 손금 봐주는 소리가
조용조용 간이 칸막이 너머로 들리던 곳
염주알마냥 둥그렇게 꿰어 도는
달력 조하이 일에 지치면
환풍기 창 너머 종묘 뜰
오백 년도 넘게 푸르른 단풍나무들처럼 살고 싶었다하루에도 서너 번 난데없이 울리던 축포소리
거리는 연일 들끓는 광장이 되고
이따금씩 눈시울 적시던 최루탄가루
한적하던 나무계단을 울리며
한 떼의 청년들이 들이닥치면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우린 원죄처럼 얼굴을 숨겼다
그때도 치욕이라는 말을 알았을까
작업장 구석에 쥐새끼처럼 숨어
토끼눈 반짝이던 청년들보다
우리가 더 막다른 곳에 다다라 있다는 아득함
내 뜻이 원하는 곳으로 당당히 끌려갈 수 있다면
하지만 상념도 잠깐, 우린 아니라고
우린 어떤 불순한 꿈도 꿔본 적 없는 조하이공일뿐이라고
곤봉 든 체포조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얼굴로 애걸하며
우리도 증오라는 말을 알았을까
수백 년의 세월을 가지런히 모아 풀칠하고
또 한 해씩을 떼어 철을 하다 보면
환기창 프로펠러 사이
고요한 종묘 담 너머 뜰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그림 : 이지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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