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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그해 여름장마는 길었다시(詩)/송경동 2020. 9. 19. 18:18
그들의 싸움은 장마처럼 길었다
와? 와아? 와아? 하며
뱃일을 다니는 사내가
밑도 끝도 없이
세간살이 하나하나를 깨나갈 때마다
부둣가 다방엘 다니는 동거녀는
썰물에 씻기는 모래알처럼 쓰러지며
와아? 와아? 와 그라는데 하며 흐느꼈다
나는 그들의 옆방
월세 10만원짜리 생활 속에
텅빈 소라껍질마냥 기구하게 누워
불도 켜지 못한 채 서러웠다
모든 건, 이 지긋지긋한 장마비 때문이라고
위안해 보지만
떨쳐지지 않는 기억들
아버지는 내게
끈질긴 미움과
풀어지지 않는 말들의 매듭과
쟁그랑 깨어지는 가슴을 물려주었다
폭풍우에 휩쓸려 온 해초들마냥
파도처럼 우악스러운 손아귀 속에서 쥐어뜯기던 어머니
퍼런 멍으로 보이던 달
새벽이면 어시장 주변을 배회하던 개들
몇 도막난 생선처럼
도매금으로 뭉툭뭉툭 잘려 나가던 젊음
왜? 왜?
왜 그랬는데?
물어도 물어도 서로 대답없는 뭍처럼 파도처럼
끊이지 않는
이 싸움은 언제나 끝나련가
먼동이 터오는 새벽
밤샘 폭풍우 잦아들고
이제 그만 와와? 와와? 쉬고 쇤 목소리들도 잔물결마냥 잦아들어
그때야 슬며시 나와 보니
깨진 그들의 한칸짜리 방 창문 너머로
기울어진 두 사람 마주앉아 있다
어이가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하랴
저기 멀리 다시 하루의 해가 떠오르고
시원한 새벽바람이 부니
다행이라고 하랴(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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