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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탁주 반 되시(詩)/박성우 2020. 9. 14. 16:53
상가(喪家)에서 고향 친구들을 만났다
어색하고 무거웠던 그 자리가
어둠에 조금씩 밀려갈 무렵
나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옛날 얘기들을 몇 개 꺼냈다
고향마을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셨던 어머니 얘기
그때 만들었다는 외상장부 얘기
내가 40년도 더 된 그 장부를
아직 갖고 있다는 얘기까지……
그날 우리는 그 장부가 있다 없다로
큰 내기를 하나 했다
나는 잊고 지냈던 그 장부를 밤새 찾았다
장부는 몇 번의 이사에도 어디 가지 않고
책장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다
설 선생 진로 1병
지동댁 연탄 숯 1봉
옥산댁 달걀 5개
아무 생각 없이 장부를 읽어 내려가다
나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어느 낯익은 이름 옆에 친구의 이름과
탁주 반 되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그건
어린 친구가 아버지를 위하여
탁주 심부름을 했다는 것이 아닌가
하루 일을 끝내신 아버님은
지친 하루를 탁주 반 되로 씻었을 것이다
친구는 또 기다리는 아버지를 위하여 연기
자욱한 고샅을 종종걸음으로 달렸을 것이다
그렇게 고만고만했던 우리네 살림살이들이
으스름 달빛 아래 하나둘 쏟아지는데 나는
다시 그 장부를 책장 깊은 곳에 넣으며 우리가
벌써 그때의 어른들을 지나간다는 것과 어느 날
이 장부를 천천히 넘길 친구의 쓸쓸함을 생각하였다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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