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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 깨진 소주병을 바라보며시(詩)/시(詩) 2020. 6. 9. 18:08
누가 너에게 다녀갔다는 것이다
누군가 너에게 왔다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군가 너의 모든 것을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다
주둥이가 깨져 가느다란 목이 사라진 병
누군가 너의 길고 아름다운 휘파람을 앗아가서
네가 네 취한 혈류를 모두 마셔버렸다는 것이다
텅 빈 스스로를 결코 참을 수 없어
공중을 향해 자신의 목을 수탉처럼 바쳤다는 것이다
비어버린 생을 용납하기 괴로워
허공의 무한한 길이 열린 창틀에
목을 매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내 안의 누군가, 네 안의 누군가
너를 비틀어 처형했다는 것이다
소주 따위야 병신 취급하며 목을 따 버리고
효수의 나머지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자신을 산산조각 냈다는 뜻이다
산산이 부숴 버리려 했으나
미련 많던 긴 목과 복잡한 머리만 박살 낸 채
텅 빈 몸뚱이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모든 걸 비우려 했지만
날카로운 한이 되었다는 것이다
금방 무너져 내릴 금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채울 수도 없는 삶이여
이제 영영 나를 버린다는 것이다
곧 사금파리가 되어 조각조각 바닥의 반짝임이 된다는 것이다
지상에 잘게 부서져 가장 낮게 두근거리는
별빛, 가장 먼 우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한 때 한 사람의 가슴을
그의 청춘을 뜨겁게
데웠다는 것이다
(그림 : 이홍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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