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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진 - 수국 아래서시(詩)/시(詩) 2020. 6. 7. 20:01
아파트 뒷마당 구석진 화단에
오래전부터 서 있던 꽃나무
그 아래 환한 적막 속으로 이끌리듯
맨발로 들어선다
오래전부터 나를 둘러싼 어둠은
이제 짙을 대로 짙어져
위급하게 깜박이는 나를
저 꽃나무에게 다 드러내 보이리라
향기를 잠재우고 내게로 귀 기울이는 하얀 꽃송이들
앓는 소리 내지 않으려 숨을 들이쉬며
꽃나무 밑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는다
나는 그동안 멀리 에돌아 다니기만 했다
견디고 참으면 나을 거라 믿었다
마른 목숨 내맡기듯
밤 깊은 통증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해
간절히 꽃나무를 올려다본다
그가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도 없이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흰 꽃 송이송이 일제히
작은 잔을 기울여 찰랑이는 빛을
내 어둔 잔에 쏟아붓는다
문득 몸 밖의 소요 그치고
나는 이제 환한 적막이다
(그림 : 김한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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