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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동면 화암리 박씨집 가을 아침시(詩)/이상국 2019. 9. 19. 16:05
예순다섯 첫새벽을 깨워 여물을 끓인다
펌프대 숫돌물에 살얼음이 잡히고
내륙의 새벽은 생철처럼 차다
된서리를 하얗게 뒤집어쓴 고추대궁들이
술꾼처럼 몸을 으슬뜨린다
자식을 있는 대로 업고
한뎃잠을 자고 난 옥시기들의 얼굴이 시퍼렇다
몸이 아주 식으면 그들은 이 집을 떠날 것이다
발 시렵다고 갈짓자처럼 날아가는
쥐똥만한 새들아
평생을 새벽부터 설쳤는데도
가을 마당엔 일이 꽉찼구나
털이 있는 대로 곧추세운 소가 콧김을 내뿜으며
애써 박씨와 눈을 맞추려 한다
"요즘 소들은 기계에게 일을 뺏기고 눈칫밥을 먹는다"
호박이 미처 무를 때를 기다리다 못해
마구간 빈자에 삐닥질해대는 소에게 그가
가래를 돋우며 망할 놈의 소새끼니 뭐니 욕세를 퍼대자
소도 혀를 빼물고 뭐라고 뿔질을 한다
닥나무 울타리를 빠져나가는 연기에
텃밭의 쇳가루 같은 서리들 스러진다
장작불 타악탁 튀어오르는 여물가마 앞에서
북두갈쿠리 같은 손으로 새벽 담배를 맛있게 피워무는 박씨
그렇게 많은 가을이 지나가고도
박씨집 마당엔 씨를 밴 고추들이 산더미 같은데
물안개를 개고 올라온 햇살이
그의 굽은 어깨를 감싸안는다
(그림 : 장정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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