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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이 날리는데
고한역에서 청량리행 기차를 탄다
밤차는 무덤처럼 적적하고
또 궁전처럼 화려하다
기차는 덜커덩거리며 강을 건너고
느닷없이 터널을 지나기도 하는데
막장 같은 어둠속에서
면사무소와 빨간 십자가와 작은 마을들이
모닥불처럼 환하게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고는 한다
길이란 게 그렇다
초행이긴 하지만 가다보면
언젠가 한 번 간 적이 있는 것 같은 건
나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서 그럴 게다
칸칸마다 흐릿한 불빛 아래
어디서 본듯한 사람들이
더러는 고개를 떨군 채 잠들었고
또 어떤 이들은 이야기로 밤을 팬다
언제 이 길을 다시 갈 수 있을까,
혹은 집 나온 지 꽤 여러 날 된 것처럼
쓸데없이 쓸쓸해져서 지나가는 어둠을 향하여
나는 칸델라 불빛 같은 생각들을 흔들며 간다
기차는 춥다고 가끔 비명을 지르지만
길은 멈추지 않는다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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