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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마구간에서 보낸 겨울밤시(詩)/이상국 2019. 11. 14. 17:26
물 버리는 소리 끝이 버적버적 얼어붙는 겨울밤
우리는 고깃근이나 끊어 들고 작은 형님댁에 모였다
부엌에서는 메 짓는 여자들 잠 먹은 소리 잦아드는데
밤 깊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점에 백 원짜리 고스톱을 쳤다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날마다 까탈을 부린다고
형수는 입술을 빼물고 넌덜머리를 냈지만
형님은 초저녁부터 취해 있었다
- 야 동생아 쥐뿔두 없이 살아도 어머이 지사만은 보란 듯 모셔야지
하며 씨부렁거리는 그의 빠져버린 앞니 사이로 말이 샜다
- 몸 생각은 안 하우
- 이까짓 놈의 세상 마시다 죽으면 말지 뭐
이렇게 빗나가는 대답이 내겐 비명처럼 들렸다
이 설 쇠면 마흔 일곱,
화투판에서도 그는 껍데기든 똥이든 닥치는 대로 먹었지만
집안귀신이 사람 잡는다며 걸핏하면 피박을 쓰기 일쑤였다이 방은 원래 마구간이었다
소 키울 힘이면 안팎이 노가다 나서는 게 낫다고
형님은 아예 쇠꼬리를 놓아버렸다
제상을 설고 안골 숙모님께 제사음식을 갖다드리고 와서야
우리는 제가끔 생각을 안고 눈을 붙였다
술에 볶이는지 삶이 너무 무거운지
형님은 돌아누울 때마다 이를 갈았다
훈김이 봉창 유리를 적시며 흘러내리다 얼어붙고
한때 대여섯 마리씩 소가 매였던 자리에
우리는 나란히 누워 겨울밤 깊이 들어갔다
새벽이 어디쯤 왔는지 한기가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그림 : 김정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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