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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희 - 이유 있는 외출
    시(詩)/시(詩) 2019. 8. 15. 19:45

     

    꽃이 피고 지는 봄날엔

    슬퍼할 겨를이 없어

    한 꽃이 지는 걸 조문할 새도 없이

    다른 꽃이 피어나 한눈을 팔게 되지

    오늘은 벚꽃이 제일 예쁘고

    내일은 복숭아꽃이 제일 예뻐

    이 꽃 저 꽃 갈아타는 나를 보면서

    너도 별 수 없구나, 하는 생각

    남자를 바꾼 것도 늘 봄이었어

    봄에는 실연당해 울고불고 할 새가 없어

    꽃이 저리 피어쌓는데

    어떻게 우울할 수가 있니?

    오늘은 사랑하고

    내일은 잊어버리는 게 봄이야

    다시는 고백 안 해

    결심해도 소용없는 게 봄이야

    봄이 되면 또 피는 꽃들

    무슨 수로 막겠니?

    봄날에 나는 기꺼이

    지조 없는 여자가 될 거야

    가볍게 사랑하고

    가볍게 떠나고 싶어

    꽃이 피는 봄날엔

    뒷짐 지고 앉아있을 수가 없어

    꽃들이 저 좀 봐달라고 아우성인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니?

    잠시 왔다가 가는 꽃을

    어떻게 그냥 보낼 수가 있니?

    봄날 내가 야생고양이처럼 쏘다니는 것은

    다 이유 있는 외출인 거야

    (그림 : 강정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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