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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 느린 우체국시(詩)/시(詩) 2019. 6. 10. 23:12
시월로 가는 간이역에서 느린 우체국을 만났습니다
느린 우체국
빨간 외발에 기대어 가을과 차 한 잔 나누는 사이 단풍나무가
엽서 한 장을 놓고 갔습니다
작년 이맘 때 상수리 숲, 청설모 겨울양식 몇 톨 덜어낸 일이
자꾸 생각나는 계절인데
그걸 눈치 챈 나무가 슬그머니 놓고 갔습니다
나는 깨알 같은 글씨로 엽서를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허락도 없이 덜어낸 양식,
이웃마을까지 탁발을 다녀왔을 눈길을 생각한다고
때늦은 후회 몇 줄 담는 사이 가을은 닫히고 손도장으로 엽서를 봉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삼백예순날을 다 걸어야 수취인에게 닿는 엽서 한 장에 나를 내려놓고
뒤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그날부터 낯선 간이역이 작은 우체국 한 칸을 싣고 밤마다 찾아옵니다
내려놓고 온 나는 보이지 않고 빈 엽서 한 장 우두커니 앉아있습니다
(그림 : 박태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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