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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피어나는 게 아니라지요
꽃은 그리는 거라지요
꽃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거라지요
꽃이 여백을 채우면 사라지는 여백도 있는 거라지요
낮고 작은 비겁으로 감춰야 하는 참혹이 있는 거라지요
지나쳐 온 자리가 맘에 걸리면 돌아가 다시 그리는 거라지요
그걸 사람들은 계절이라 부르는 거라지요
계절은 반성의 무늬로 건너가는 거라지요
살짝 접어놓은 페이지의 어떤 절망을 일으켜 세우는 거라지요
그건 어둠이 끝없이 펼쳐질 때 빛이 단추를 풀고 쑥 들어오는 거라지요
꽃은 속옷 속으로 들어온 바람을 품고 그리는 그림인 거라지요
꽃이라는 그림은 태어나고 돌아가는 연습인 거라지요
터졌다 맺히고 터졌다 맺히는 허물어져 가는 것들의 사랑인 거라지요
사랑은 피어나는 게 아니라 기쁨이 오면 기쁨을 그리는 거라지요
사랑은 지는 게 아니라 슬픔이 오면 슬픔을 그리는 거라지요
그러니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라지요
그러니 땅을 파고 구근을 옮겨 심으면 되는 거라지요(그림 : 김미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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