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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리 - 양파를 샀어요시(詩)/시(詩) 2019. 5. 29. 09:07
는개비 내리는 퇴근길이었어요. 한적한 길거리 구석에 석고상 같이 앉아 있는 노점상 할머니를 만났죠.
양파의 겉껍질처럼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메마른 손마디가 보이네요.
비 가림도 없이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구부정히 앉아있는 할머니,
괜스레 훔치고 싶은 그리움 하나 목울대에 걸려 양파를 바구니 가득 샀어요.
마른 껍질을 벗기고 보니 둔부처럼 허연 속살, 탱글탱글한 탁구공처럼 곧 튀어오를 것 같았어요.
아! 그러고 보니 내 중심도 양파와 같이 고밀도로 차오르던 때 있었어요.
세상이 내 것이던 때, 하지만 물 흐르듯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갔지요.
순한 껍질을 벗기면, 두 눈이 아프고 따끔거려 눈썹창에 대롱대롱 물방울을 매달곤 했지요.
둥근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잘게 썬 양파를 볶으면 뜨거운 열기 속에서 매운맛은 감쪽같이 사라졌지요.
때론 눈물나는 일들도 세월이 지나면 매운맛이 사라져서 달콤함과 향기로움만 남아 입안에 맴돌 때가 있지요.
그래요. 이렇게 달구워져 향기로워지고 싶을 때 있어요.
이제는 겨울의 끝자락에서 말라 부서지는 껍질처럼, 손끝만 닿아도 무너지는 모래알 같은 척박한 마음자락,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더 많아진 거죠. 노점상 할머니가 파는 그리움처럼……
는개비 :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
(그림 : 손희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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