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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전주(全州) 한옥 길시(詩)/이기철 2019. 3. 5. 20:07
풀이파리 같은 옛 노래 한 소절
자드락길섶에 봉숭아꽃으로 피어있는 곳
바다까진 못 간 햇살이 사금파리에 담겨
초록을 물고 눈 시리게 반짝이는 곳
처마 아래 제비꽃모종 옮겨놓고 호미 씻는 이들이
천 년 전 백제말로 인사를 나누는 곳
짚세기 걸음에도 발길마다 노래가 묻어있어
아쟁소리에 맞춰 허밍하고 싶은 곳
그곳에 사금파리 반주께 소꿉살림 차려놓고
오늘 하루만 너와 나 신랑각시놀이 하는
열두 살이 되고 싶어라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오십 년 전 처음 써 본 연서
못다 쓴 마지막 구절 하나 마저 쓰고 싶어라
부칠 데 없는 그 편지 강물에나 띄우며
종이배 흘러가는 끝끝까지 영화 속 소년처럼 따라가고 싶어라
따라가다 길 놓치고 싶어라, 영영 돌아오지 않고 싶어라
가깝고도 먼 완산, 내 할버지의 본향, 전주
(그림 : 이택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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