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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 거룩한 사무직시(詩)/이명윤 2018. 12. 19. 16:12
시금치를 시금치라 부르지 못하고
눈만 끔벅거리는 염소들을 사랑한다
보고서가 날아다니는 사무실은
푸른 초원 같아,
새떼처럼 우아하게 휘날리는 A4용지와 흑백으로 복사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사랑한다
날아드는 상사의 눈빛을 피해 일제히 고개 숙인 모니터를 사랑한다
중세기 교회의 말씀처럼 납득할 수 없는 순간마다 천장에서 신호처럼 내려오는 밥줄을무의식적으로 사랑한다
형광등 불빛 아래 숨소리마저 사무적으로 관습화된 노동을
사랑할수록 점점 입체적으로 온전해지는 스트레스를
제정신이 아닌 정신의 세계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귓속말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복도와
찬란한 훌쩍거림을 멈추고 전송하는 욕설과
삼삼오오 모여드는 신발들을 사랑한다
만일을 대비하여
복도 끝에서 지키고 선 소화기를 사랑한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능청스러운 얼굴을
이젠 사용법도 흐릿해진 하루를 숙명적으로 사랑한다(그림 : 방정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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