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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광주리를 그대 곁에 놓아두겠습니다
가는 빗소리로 올을 엮었습니다
고리 긴 여름을 따라 그늘이나 탕진하러 가겠습니다
무화과나무 둥치에 앉아 어룽거리는 빛의 무늬들을 파도인양 바라보겠습니다
멀미가 올라오면 다디단 열매로 속을 씻고
날을 새우기 시작한 바람으로 이마를 씻고 다시 앉아
월출산 넘어 제 시름에 여위는 조각달을 보겠습니다
돌아오면 광주리만 기다리고 있겠지요
깊어진 그대가 일광의 알곡들을 거둬두고 갔겠지요
서리가 다녀가고 이파리도 사위어 천지간이 비어버릴 때까지
눈으로 읽고 손으로 읽기만 하렵니다
폭설이 백지 한 장 마련해주면
붓을 들어 한 알마다 들어찬 팔만하고도 사천 자를 필사하겠습니다
해토머리까지 거듭하다가 누구를 기다렸는지도 습관처럼 잊겠습니다
꽃구경이나 가겠습니다
진달래를 처음인듯 다시 보겠습니다
꽃은 땅에 뿌리를 둔 목숨들의 일이듯
사랑은 두발짐승들의 서로 다른 보폭임을 진달래는 모를겁니다
해토머리 : 봄이 되어 얼었던 땅이 녹아서 풀리기 시작할 때
(그림 : 김종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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