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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윤수 - 저녁은 단벌신사시(詩)/시(詩) 2018. 1. 31. 17:23
내가 고등학교 때, 늘 낡은 양복 한 벌만 입고 다니시는 교장선생님께 단벌 신사라고 놀리면
교장 선생님은 때 묻은 것이 권위 있다며 찡긋찡긋 웃곤 하셨네
진부하면서도 유서 깊은
이 저녁의 권위는 어디에서 왔을까
오래되기로는 저녁만한 것이 없고
때 묻은 것이야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저녁이 많았으니
저녁도 단벌 신사,
저녁이 단벌 신사라면 그 구두도 나달나달 닳고 구멍 났겠지
유구한 저녁의 힘은 그렇게
눌러 붙은 다리미 자국과
기울고 구멍 난 저녁의 구두 뒤축에서 오는지도 모를 일,
밤수지맨드라미 빛 노을 위로
새들도 단벌로 날아가고
먼 길 걸어온 사람들은
팥 앙금처럼 쌓이는 어둠 속에 두 발의 뿌리를 내리네
씻고 벗고라는 말,
하나뿐인, 한 벌뿐이라는 뜻
씻고 벗고라는 간결이
얼갈이 열무김치 맛처럼 좋아라
열 벌 스무 벌보다 단벌이 권위 있어
도둑도 단벌은 훔쳐가지 않네
오래되고 때 묻어서 더욱 빛나는 단추들
그 별자리 이름을 불멸의 저녁이라 하자
(그림 : 박영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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