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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와 - 지하역
    시(詩)/시(詩) 2018. 1. 28. 16:10

     

    지하 30미터,
    한때는 만개한 꽃처럼
    구김 없는 선명한 모양의 화석들이 이곳 어디엔가
    오랜 비밀로 박혀 있었음직도 한,
    수천 수만 년 동안 지하 어둠의 사슬에 묶여
    미동도 없던 영혼들이
    길이 뚫리고 빛이 스며들면서 하나 둘
    마법에서 푸려나 지금은 내가 서 있는 언저리를
    휙휙 날아다닐 것도 같은,
    지하역, 아직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시간이
    벽과 천장의 구석진 곳에 은밀히 흐르고 있다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나주시기 바랍니다)
    육체 없이 영혼만 타고 내리는 열차도 있을까?
    요즘 들어 내 영혼보다 비대해진
    몸뚱어리가 거추장스럽다
    공복의 허전함으로 비롯된 심약한 생각의 끈을 자르고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선다
    충족되지 못한 뱃속의 허기처럼
    보호구역 안에서도 늘 불안함을 느끼는,
    206개의 뼈마디로는 지탱하기 힘든 지상의 무게가
    선로 위에 앉은 빛 한줌까지 파르르 떨게 한다

    희끗희끗 색이 바랜 벽화의 인물처럼
    창백한 얼굴들이 승차구에 모여든다
    어쩌다 땅 속까지 추방당한 아침
    거추장스러운 그림자를 하나씩 끌고,
    언젠가 화석으로 남을 시간들을 등에 지고,
    깜깜한 터널 속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저 눈동자들
    어두의 틈새로 열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이는 순간
    닫혀 있던 마음의 동공이 환히 열린다
    언젠가는 출구 없는 지하역에서 영원히 맴돌지라도
    아직은 살아 지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림 : 방정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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