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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권 - 배낭이 커야 해시(詩)/시(詩) 2018. 1. 10. 22:38
집 나올 때는 배낭이 커야 합니다
집을 가지고 다녀야 하니까요
아무 데서나 자려면 돗자리는 있어야 하니까요
지붕은 필요 없어요
별을 세다가 자야 하니까요
새벽을 위해서는 배낭이 커야 합니다
반짝 열리는 인력시장에서
뭔가 단단히 준비하고 온 걸 보여야 하거든요
고달픈 인생은 우리 사이에서 계급장이지요
흔해빠진 연애사건 하나와
술자리에서 펼칠 무용담 몇 가지 여유 있게 담으려면
배낭이 커야 합니다
오늘은 양평에서 고추 따는 일이 걸렸어요
일 끝내고 가져갈 만큼 가져가라는 인심을 담으려면
욕심껏 배낭이 커야 합니다
상품 안 되는 것 공원에서 팔면
피로 만든 선지국밥 한 그릇은 남길 수 있어요
아, 나는 그 선혈을 담기 위해 큰 배낭을 짊어졌습니다
벌써 환갑이 코끝에 닿은 나이
내 몸보다 큰 배낭을 짊어졌습니다
젊었을 땐 그게 무겁지 않았어요
청춘을 담을 공간이 필요했어요
왜 집을 나왔느냐고요?
아직은 담아야 하니까요 나는 담기기 싫었습니다
그러므로 배낭은 커야 합니다
별을 향해서라도
노숙을 향해서라도
(그림 : 김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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