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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동균 - 보말죽
    시(詩)/시(詩) 2018. 1. 7. 18:37


    지난 봄 내가 한 달 남짓 묵었던 금능리 77번지 양철지붕 집 양선자 할망은

    아침 일찍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떤 날은 소라며 미역을, 또 어떤 날은 흙 묻은 양파와 마늘을 한 아름 들고서

    나를 볼 때마다 늘 웃기만 했지요

    눈과 귀와 코와 입이 부서졌다가 한 순간에 모두 다 제 자리에 새로 생기는 그런 웃음이었어요 

     

    원체 말이 없어 벙어린 줄 알았으나 이따금 한밤중에 큰 소리로 통화를 하곤 했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무슨 귀신과 싸우는 것 같은 그 목소리를 들으면

    난데없이 내 이마엔 열이 끓어오르고 입술이 퉁퉁 붓고 팔과 가슴과 사타구니엔 붉은 반점들이 타올랐습니다

     

    내가 멀리 오긴 왔구나, 하지만 아직 한참 멀었구나, 생각하면서

    나는 바깥으로 나와 시커먼 돌담 옆을 서성이며 심호흡을 하고 열을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다시 서울로 돌아가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피가 흘러가는 대로 살아야겠다며

    파도가 넘쳐나는 방파제 끝까지 걸어갔다 와서는 새끼를 한 배 낳은 개처럼 잠들곤 했는데,

    다음 날 아침이면 보말죽 한 그릇이 방문 앞에 놓여 있었지요

     

    흰 사발 가득 봄 바다가 소스라치듯 출렁대는 그것이 마치 약 같고 독 같고 눈물로 부서진 누군가의 눈 같아서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숟가락질을 해야만 했는데요

    어느 틈에 바닥까지 훔쳐 먹고 나면 내 귀 옆엔 작은 아가미가 하나 파르르 돋아나고

    나는 사람으로 살아온 기억을 잃어버렸다가 저녁에야 간신히 되찾곤 했더랬습니다

    보말죽 : 제주도 향토음식. 불린 쌀을 참기름에 볶다가 삶아서 발라낸 고둥살과 내장을 으깨어 물을 부어 체에 내린 국물을 붓고

    쌀알이 퍼지도록 끓인 다음 소금으로 간을 하고 실파를 올린 죽으로 고둥죽, 고매기죽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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