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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연 - 모두가 빚입니다시(詩)/시(詩) 2017. 12. 17. 13:49
자두나무식당 현석이가 잡은 민물새우
한 움큼 덜어 매운탕을 끓입니다
이제는 저 하늘에서 굽어보시는
슬이 엄마가 선물한 장수 돌냄비에
기영이네 밭 무 한포기 얇게 썰어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고 기다립니다
센불에 펄펄 끓이고 나서
상근 씨 밭에서 따온 청양고추와
승훈이 할머니가 주신 마늘과 양파
그이가 심은 대파를 썰어 넣습니다
뽀글뽀글 잘도 끓고 있습니다
대감님이 다듬어준 생강 한 뿌리
아랫집 아재가 찧은 고춧가루와
면장님이 보낸 액젓으로 간을 맞추고
당숙모님네 들기름 몇 방울
영규 씨가 준 매실 엑기스와 소주
후추와 미원을 시늉으로 뿌립니다
그러고 나면 다 된 듯싶습니다
새우탕 한 냄비 장만하는 데
열도 넘는 이웃들에게 빚을 집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물을 붓고 무와 양파를 썰고
순서와 양을 알맞게 조절하는 일
매실주 한 잔 마시는 일뿐입니다
물이랑 연료랑 술조차도
기실 하늘땅님 4은님 은덕 아닌가요
행주좌와(行.住.座.臥)
어묵동정(語.黙.動.靜)
숨 쉬는 일까지 일체의 사람살이가
어느 하나도 나만의 공덕은 없습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도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일도
모두가 빚투성이입니다.
(그림 : 방정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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