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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저녁의 질감시(詩)/윤성택 2017. 6. 25. 19:22
새들은 아무도 기약하지 않는 곳에 날아가 빈집을 낳는다
침목의 결이 커튼처럼 역과 역에 접히면 민박집 창이
열렸다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그날의 연한을 모르는 낙서와 같은 고백이
빈방에 남아 시들어가는 노을을 걸어둔다
수첩 속에는 휘청거리는 문장들이 닻을 내리고
저녁의 심지 같은 쓸쓸한 몽상만이 끝없이 흔들린다
가까이 만지기 위해 손 내미는 회색 테트라포드,
삐죽빼죽한 새벽이 부서지고 또 부서져도 나는
내 빈틈으로 드나들던 슬픔을 알지 못한다
등대는 하얀 기둥을 열었다 닫으며
물결에 열주를 드리운다 바닷속으로
사라진 그림자들이 조난신호처럼 불빛을 축조하는 밤
나는 심해로 가라앉는 피아노를 생각한다
검은 건반의 음은 더 이상 항해하지 않는다
썰물이 휩쓸고 간 해변에 장갑이 떠밀려가고
내가 거역할 수 없는 은유가 운명처럼
나를 데려간다고 믿는다
안개가 꿈꾸는 부두 너머 길이 있고
가보지 못한 날이 열려 있는 가방이 있다
모든 길이 사라진 저편, 맹렬하게 소멸해가고 있는
한 점은 다시 누군가의 눈(目)이 될 것이다
(그림 : 김성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