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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영민 - 과수원
    시(詩)/고영민 2017. 2. 9. 14:13

     

    내가 하는 일은 농약이 바닥에 가라앉지 않도록 하루 종일 약통을 저어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중간에서 호스를 당겨주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1만 평 과수원의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빠짐없이 농약을 쳤는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햇빛에 앉아 막대기로 커다란 농약통을 젓는 것이 여간 지루하고 심심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그 긴 막대기로 약통 안에 영어 스펠링도 쓰고, 씨발이라고도 쓰고, 보지라고도 쓰고,

    막대기를 빠르게 휘저어 회오리를 만들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이웃마을 김인순의 이름도 썼다가 지우기도 하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나절 사과나무에 약을 친 아버지가 물큰 농약냄새를 풍기며 내게 걸어와 마스크를 벗으며 하시는 말이,

    너 하루 종일 약통에다 뭐라 썼는지 내 다 안다! 라며 내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웃으시는데

     

    내가 저은 약통의 농약이 어머니가 당기던 길고 긴 호스를 타고 흘러 아버지가 들고 있는 분무기 노즐을 빠져나올 때

    ~발씨발씨발, ~지보지보지 이렇게 나왔던 걸까, 아버지랑 어머니는 농약에 취해 회똘회똘 집으로 향하고

    나는 국광처럼, 홍옥처럼, 아오리, 부사처럼 얼굴이 자꾸만 빨개졌다

    (그림 : 이승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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