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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자귀나무 그 집시(詩)/손순미 2016. 10. 21. 10:47
우리는 염소처럼 집 주위를 맴돌았다
넓은 마당에 별 같은 꽃들이 돋아있고
텃밭의 야채는 힘껏 솟아 있었다
주인은 온데간데없고
집 앞 자귀나무 가지에
<집 팝니다> 푯말만 늘어지게 걸어놓았다
졸지에 부동산이 되어버린 자귀나무
우리는 자귀나무 처마 밑에서 주인을 기다렸다
자귀꽃 그늘 아래 연분홍 향기 은근하게 서성이고
우리는 새삼 오래된 신혼을 펼쳐보았다
해바라기가 우아한 목으로 지붕을 지그시 누르던 그 집
꿈을 꾸면 장난감 같은 허술한 집들이
와르르 언덕 아래로 쓸려가던,
생선장수가 헉헉 숨차 오르던 집
아이들이 상자 속의 사과알처럼 잠들던 집
때로는 그 집을 분실할까봐 주머니처럼 차고 다녔다
우리의 오늘은 그 주머니에서 나왔다
가난만을 상속받은 자들의 유토피아는
근로의 미덕이었다
우리는 한참을 지지배배 속살거리다가
자귀꽃 신혼을 마무리지었다
마당의 외등에 저녁 햇살이 켜지고
자귀나무 부동산엔 손님이 들지 않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주인은
도저히 추억을 팔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추억은 집의 영혼인 것이다
우리는 자귀나무 푯말에다 이렇게 썼다
당분간 자귀나무 추억을 임대 받는 것도 괜찮다고.(그림 : 주민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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