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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예천 태평추시(詩)/안도현 2016. 5. 31. 22:26
어릴 적 예천 외갓집에서 겨울에만 먹던 태평추라는 음식이 있었다
객지를 떠돌면서 나는 태평추를 잊지 않았으나
때로 식당에서 메밀묵무침 같은 게 나오면 머리로 떠올려 보기는 했으나
삼십 년이 넘도록 입에 대보지 못하였다
태평추는 채로 썬 묵에다 뜨끈한 멸치국물 육수를 붓고
볶은 돼지고기와 묵은 지와 김 가루와 깨소금을 얹어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음식인데
눈 많이 오는 추운 날 점심때쯤 먹으면 더할 수 없이 맛이 좋았다
입가에 묻은 김 가루를 혀끝으로 떼어 먹으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바다며 갯내를 혼자 상상해본 것도 그 수더분하고 매끄러운 음식을 먹을 때였다
저 쌀쌀맞던 80년대에, 눈이 내리면,
저 눈발은 누구를 묶으려고 땅에 저리 오랏줄을 내리는가? 하고 붉은 적의의 눈으로 겨울을 보내던 때에,
나는 태평추가 혹시 귀한 궁중음식이라는 탕평채가 변해서 생겨난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허나 세상은 줄곧 탕탕평평(蕩蕩平平)하지 않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탕평해야 태평인 것인데,
세상은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기울기 일쑤였고
그리하여 탕평채도 태평추도 먹어보지 못하고 나는 젊은 날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술집을 찾아 예천 어느 골목을 삼경(三更)에 쏘다니다가
태평추라는 세 글자가 적힌 식당의 유리문을 보고 와락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 있었던 것인데,
그 앞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다가 대신에 때마침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말았던 것인데,
그날 밤 하느님이 고맙게도 채 썰어서 내려 보내주시는 굵은 눈발을 툭툭 잘라 태평추나 한 그릇 먹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간절하게 참 철없이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탕탕평평(蕩蕩平平) :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바른 길을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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