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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용 - 서 있는 사람시(詩)/시(詩) 2016. 4. 23. 15:25
봄비가 내린다.
어제 환하던 햇살이 오늘은 물보라로 바뀌어 흩어진다.
내일이면 연둣빛 나뭇잎들이 초록의 계절로 들어설 것이다.
당신, 빗속 걷기를 좋아하는가.
누군가 맨몸으로 비를 맞으며 총총 뛰어간다면,
나는 얼른 쫓아가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어진다.
지난번엔 정말 그런 적이 있다.
옛 애인처럼 보이는 낯선 여자였을 것이다.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스커트를 입었을 것이다.
카페 앞 가로수길이었을 것이다.
내가 손을 잡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당황한 듯, 아니 황당한 듯, 서로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30초쯤 서 있었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난 30년 세월과 겹쳐졌다.
그리고 내가 돌아섰을 때, 그는 못 박힌 듯 그대로 서 있었다.
다음 날, 비 그치고 햇살 났을 때, 나는 보았다, 그가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는 것을.
그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잎사귀들이 더 푸르고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림 : 김주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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