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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늦게 피운 꽃시(詩)/길상호 2016. 2. 15. 10:27
동백 화분을 하나 들여놓고서 봄이 다 가도록 앓았습니다
내 속에 황사 바람 불어 아득해질 때마다
먼지처럼 가벼운 기침을 해대면서 나무 곁을 서성이곤 하였습니다
빗방울은 봄을 불러다 마음속에 아지랑이를 피워 놓고서
어디 머나먼 곳으로 달아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철 푸르렀을 잎 수북이 떨구어 내던 그 나무도
물 뿌린들 식지 않는 사막을 불러 제 속을 태우고 있던 것이지요
오래 맺혀 있던 꽃망울까지 하나 둘 투둑, 놓아 버리는 가지 끝 손들,
희망보다 절망이 절실한 때가 있음을 그 나무는 깨닫고 있었나 봅니다
나는 마른 가지를 꺾으며 그 속에 물든 그늘까지 솎아 내고 싶었지만
그늘은 나무를 지탱하는 유일한 힘인 듯 보였습니다
나무는 그늘에 기대어 마지막 생을 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봄이 다 지날 즈음에서야 빗방울은 하나씩 다시 떨어져
불덩이처럼 뜨거운 동백의 이마를 짚어 주더군요
그늘이 품고 있던 봉우리 하나 그때 꽃으로 하나 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동백나무는 이제 되었다고 정말 되었다고 속삭이면서
꽃잎을 통째로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림 : 한순애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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