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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이 등을 맞대고 앉아
서로를 외면하던 날들은 지났다
계절이 가고 또 지나고 보니
다짐은 그리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모래를 덮어쓰고 해당화 시들기도 전에
가슴에 달아둔 나비는 날아가 버렸다
세월을 사정없이 물어뜯던 파도는
이제 또 잘 길들여진 개가 되어
바다의 상한 발목을 핥고 있었다
온기도 없는 달이 뜬 밤
수천 겹 물결을 열고 아픈 이름들이
기포처럼 떠오르기도 했지만
얼굴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꺼져버렸다
명치에 가라앉은 바다가
다시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는 차가운 밤을 쓰다듬었다
잠잠해진 꿈속에서 건져낸 나의 심장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조개처럼
갯내 가득한 진흙만 채워져 있었다
(그림 : 차일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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