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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봄꽃나무 한 그루시(詩)/심재휘 2015. 12. 13. 13:58
봄꽃나무는 어쩔 수 없이
나뭇가지 하나로 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꽃이 한 나무에 내리기 위해 준비한 그 오랜 시간도
바람 부는 아침의 어느 가지 위에 놓이고 나면
결국 꽃 한 송이의 무게로 흔들릴 뿐
꽃 핀 가지는 또 새 가지를 내어
조금씩 가늘어지는 운명의 날들을 선택한다
그래서 해마다 봄에 관한 나의 고백은
꽃을 입에 문 작은 새처럼
꽃가지에서 빈 가지고 옮겨 앉고 싶을 때가
많았다는 것인데
삶이 시시해진 어느 봄날
만개한 봄꽃나무 밑을 지나다가
나는 꽃들을 거느린 가지들의 그늘에 잠시 누워
활짝 핀 꽃나무의 풍경 하나를 보고 싶어진 것이다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 피는 꽃들이
가지마다 저대로 살아가는 한 나무를
봄꽃나무에 대한 그대의 기억이
단지 그대가 손 내밀어 잡았던 바로
그 가지의 꽃향기로 언제나 술렁거리는 것인데 혹시
그대가 가지 못한 어느 길에 대해 궁금해한다면
나처럼 만개한 봄꽃나무 아래 잠시 누워보라
그대가 기억하지 못하는 저 수많은 가지의 꽃들도
모두 하나의 꽃 이름으로 지금 불타고 있다는 사실(그림 : 강정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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