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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 보이고 벼랑 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인 줄만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푸른 이끼를 스쳐간 이 큰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니뒷짐 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쫓기고 쫓겨 까마득한 벼랑으로 접어드는 내 뒤에 또 한 마리 산양이 보인다.
겨우겨우 벼랑 하나 발 딛고 선 내 뒤를 따르는 초식동물 한 마리가 보인다.
(그림 : 구병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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