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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윤천 - 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
    시(詩)/정윤천 2015. 6. 11. 11:52

     

     

     

    이웃집의 일로 공음에 다녀 오는 길에 면소의 약국에 들렀다

    근육통(筋肉痛)은 한 사흘째 목울대 아랫쪽으로 똬리를 틀었고

    파리똥이 낀 선반 위에서 먼지 둘러쓴 물 파스 상자를 더듬고 있는

    약사의 손길은 또 한참이나 더디다

    초점이 머언 눈빛 속으로 불현듯 내게도 들켜오던 초로의 날들이

    느리게 느리게 거스름 돈을 헤아리고 있을 즈음에 이르면

    어느 후미진 마을의 지명과, 그 곳의 사람들과 함께

    느린 몸짓으로 세월의 더께를 둘러 쓴 잔잔한 그의 등 뒤에서, 나는

    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

     

    무엇들과 함께 어깨를 걸고 스스럼 없이 저물어 가는 일이 때로는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웃 집의 심부름같은 것으로

    공음에 다녀 와야 하는 행위같은 것일지라도

    혹여 억울한 마음으로 쓸쓸해 하지는 말라는듯이

    길 가엔 말없이 가을꽃들이 피었다. 그것들은 바람 속으로

    마른 어깨를 흔들어 주기도 하는 양이어서,,,,,,

    내 수중엔듯 작은 카메라 같은 것이라도 하나 있다면

    잠시 길을 멈추고 흑백 사진이라도 한 장 찍고 싶었다

     

    늙은 약사처럼이나 나도

    어느 먼지 낀, 옛날 다방같은 구석진 자리에 걸터 앉아

    이제는 사진 속에 인화되지 않은 꽃빚깔 같은 것들, 말하자면 연분홍 닮은

    추억의 일들이며, 초록의 지난 시간들을

    느리고도 가만한 손길로 어루만져 보고 싶기도 했다

    이후로도 혹시 공음에 오는 길이라면

    늙은 약사는 여전히 느린 몸짓으로 돌아서서

    천천히 거스름 돈을 건네 줄것도 같았다.

    공음면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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