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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창환 - 낯선 집
    시(詩)/배창환 2015. 3. 31. 11:45

     

    나 오래 전부터 꿈꾸었지 멀고도 가까운 훗날

    내가 살고 잇는 이 집 지나다 무작정 발길 이끌어 들르는 때를

    그때 이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 타고 놀던 밝은 햇살과

    그늘이 흐릿하게 새겨진 오래 된 이 목조 건물에는 낯선

    사람들이 살고, 중년 안주인이 마당과 부엌을 방앗간 참새처럼 들락거리면서

    수돗가에 앉아 방금 텃밭에서 뽑아온 배추를 씻고 파를 다듬고

    둥근 기와지붕도 잡풀 성성한 앞마당도 백구 강아지도 뒤란의 물길도

    이 집 지켜 온 감나무 가지도 청설모가 들락거리던 속이 텅텅 빈 호두나무도

    우물 메운 자리 뿌리 내린 매실나무도 어린 불두화도

    어떤 것은 그대로이고 어떤 것은 몰라보게 자랐고 어떤 것은 사라져버린

    서서 생전 처음 보는, 아주 낯선 집처럼 서서 흐려가는 집

     

    나는 모른 체 마당에 들어서서 옛날 영화에 나오는 선비처럼

    이리 오너라, 호기로이 큰 소리로 주인을 부르려다 말고

    계십니까? 계세요? 안에 아무도 안 계십니까?

    소리 낮추어, 지나가는 사람인데요, 목이 말라서, 입을 열어

    물 한 그를 얻어 천천히 마시면서 눈은 재빨리 마루 안쪽

    지붕을 지탱하는 아름드리 적송 대들보와 거기서 발 죽죽 벋은 서까래와

    언젠가 손질하려다 결국 못하고 만, 회 떨어져 나가 둥글게 패인 자국과

    남궁산의 89년 작 ‘봄처녀’판화 걸었던 못자리와 내 책장 섰던 자리

    꽂혔던 잡지와 흔들릴 때마다 나를 받쳐 온 시집들을 떠 올려보면서

    이윽고 내가 물그릇을 다 비우고 빈 그릇을 돌려주며 주인 아주머닌

    참 별 희한한 사람 다 있네, 남의 집 뭐 한다고 뚫어보고 난린고, 고개 갸우뚱하며

    미닫이 유리문을 스르르 쾅, 닫아버릴 때 내 가슴도 함께

    닫혀버리는 짧은 순간, 아찔해져 비틀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발길을 돌려 돌아가는······ 그런 순간은

     

    그러면 나는 안녕,

    나의 집이여, 고마운 햇살이여 그늘이여, 바람에 쌓여 간 시간이여

    안녕, 지난날들에 무수히 고맙다고 아프다고 절하고 돌아서면서

    변함없이 돋아난 마당의 잡풀바다 머리 쓰다듬어 주고 변함없이

    푸르른 하늘, 동산 상수리나무 머리 위로 내려온 파란 하늘에 손을 적시면서

    발걸음에 바위 추를 달고,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면서

    그래, 인생이란 이런 거야, 그럼, 이런 것이고말고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다짐하며 돌아서는 집

    그날을 꿈꾸면서, 그날이 오기를, 그날이 오지 않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오늘도 그리운 그 옛집 낯선 집에 산다

    (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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