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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채 고쳐 지으려고 흙집 헐어내니
천장 흙벽에 숨어 얼굴 한번 안 보여주던
기둥이며 대들보 서까래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 옛날 심산(深山) 식구들과 고즈넉이 살다 대목의 눈에 들어
이리로 시집 왔을 적송 등걸들이
인근 구릉이나 논밭에서 져 날랐을 황토와 볏짚에 엉긴 채
무거운 짐 내려놓은 듯 너무 편안히 누워있다
이 거무레한 몸으로 엄동설한 다 받아내어
이 집 식솔들 한세상 견뎌 살게 한 것인가
그 얼굴이 보고 싶어 그라인더를 댄다
지그시 힘을 줄 때마다 깎여나가는 시간 너머로
한때 푸른 대지와 심호흡 주고받았을 작은 옹이들이
별꽃처럼 파르르 돋아오고
햇살과 그늘 놀다 간 자리, 둥근 나이테로 살아오는데
나무의 얼굴에 가만히 내 얼굴을 댄다 오늘 나는
어떤 무늬로 살았을까, 먼 후일 나는 누구에게
어떤 무늬로 발견될까, 생각하면서
그 얼굴에 내 얼굴 갖다 대면
내 생의 무늬도 한결 따스하고 환해질 것 같아서(그림 : 전성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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