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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주파였다, 막걸리만 마셨지만
누군가 그렇게 불렀으므로
우리는 그냥 소주파라 불렀다.
학교 꽃시계가 보기 싫어 침을 거꾸로 돌리거나
본관 앞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내다 쫒겨 가면서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면서 칠성시장 바닥을 누비는 것으로
통금시대의 어설픈 반항정신을 체득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씩 군대로 사라지거나 촌동네의 풋내기 선생으로 잠적하였고
1980년 어느날 제대 복학해서 맞이한 몇몇과
그해 5월을 남도에서 보내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말을 잊어버린, 눈에는 번득이는 살기로 범벅이 된,
언제나 얌전하기만 하던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새로 소주파가 되었지만 이미 옛날의 우리는 아니었다
우리 중 아무도 속죄양이 된 친구는 아직 없었고
모두 사지가 멀쩡하게 살아 있으므로 아무도 할 말은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또 마시기 위하여 모였지만
술로서 허송해버린 그 장난 같은 세월을 되풀이 할 수 없음을
서로가 묵시록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회개하기 시작한 소주파였다
배창환시인은 경북대학교출신, 경북대학교 교화가 감꽃이며 교내에 감나무가 많음
칠성시장 :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1가에 위치한 시장
(그림 : 유명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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