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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석 - 고야(古夜)
    시(詩)/백석 2015. 3. 16. 05:16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소를 잡어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 아래 고래 같은 기와 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 가진 조마구 뒷산 어느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 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보는 때 나는 이불 속에 자즐어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또 이러한 밤 같은 때 시집갈 처녀 막내 고무가 고개 너머 큰집으로 치장감을 가지고 와서 엄매와 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 불을 밝히고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는 밤 같은 때

    나는 아릇목의 샅귀를 들고 쇠든밤을 내여 다람쥐처럼 발거먹고 은행여름을 인두불에 구어도 먹고

    그러다는 이불 위에서 광대넘이를 뒤이고 또 누어 굴면서

    엄매에게 웃목에 두른 평풍의 새빨간 천두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고무더러는 밝는 날 멀리는 못 난다는 뫼추라기를 잡어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무르며 흰가루손이 되여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섣달에 내빌날이 들어서 내빌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쌔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내빌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여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위에 떡돌 위에 곱새담 위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내빌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물을 내빌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어도 먹을 물이다

    노나리꾼 : 농한기나 그밖에 한가할 때 소나 돼지를 잡아 내장은 즉석에서 술안주로 하는 밀도살꾼.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 멍석에 널어말리는 곡식을 멍석 채 훔쳐간다는.

    니차떡 : 이차떡. 인절미를 말함.

    청밀 : 꿀.

    조마구 : 옛 설화 속에 나오는 키가 매우 작다는 난장이.

    재밤 : 깊은 밤.

    자즈러붙어 : 자지러붙어. 몹시 놀라 몸을 움츠리며 어떤 물체에 몸을 숨기는 것.

    치장감 : 혼삿날 쓰이는 옷감.

    삿귀 :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의 가장자리.

    쇠든 밤 : 말라서 새들새들해진 밤.

    여름 : 열매.

    인두불 : 인두를 달구려고 피워 놓은 화롯불.

    광대넘이 : 앞으로 온몸을 굴리며 노는 유희.

    천두 : 천도 복숭아.

    쩨듯하니 : 환하게.

    놀으며 : 높은 압력에 솥뚜껑이 들썩들썩하는.

    무르끓고 : 끓을 대로 푹 끓고.

    죈두기송편 : 진드기 모양처럼 작고 동그랗게 빚은 송편.

    (그림 : 림용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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