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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부는 것은 몇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꼭 같다.
단군할아버짓적 박달나무 가지끝에서부터 불던 바람이
하사(下賜) 받듯 차례로 징검다리를 건네온 것이
목하(目下), 수 천년 귓구멍 뚫린 콧구멍 뚫린 살풀이 한다.
바람 부는 날, 청솔방울 몸 데울 때는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자.
밥그릇이 넘치도록 피리를 불자.
밥상 위의 밥그릇, 밥상 밑에 밥그릇,
부뚜막 위에 밥그릇, 부뚜막 밑에 밥그릇,
장독간에 밥그릇, 마당가의 개밥그릇......
어디를 가나 밥그릇은 하나씩 놓여 있다.
하나씩 놓여 있는 밥그릇에 육정(六情)의 당국화(唐菊花)는 피고
한 그릇 한 그릇씩 떠받들어 온 향(香)불, 숙원이여.
내 물려받은 하나의 밥그릇에도 조석(朝夕)으로 김이 서리고
그 당국화(唐菊花)같은 향(香)불같은 풀리지 않는 새벽 강의 김이 서리어
바다로 밀려난 뱃머리에서나 산으로 올라간 상여꾼의 북소리 끝에도
그 김이 서려 있는 걸 나는 보았다.
오늘 아침 밥상 위에도 맨 그 김은 서리고
새 바람 아닌 새 바람이 이 밥그릇으로 내림하는 수작을 알아차린
나는 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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