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일 - 지워진 것들에 대하여

 

가장 낮은데로부터 소멸은 오네
연이은 대설주의보에
채소다발을 쓰다듬던 노점상은 귀가를 서두르고
그가 앉았던 자리 덤으로 피웠던 가난한 온기가 지워지네

큰아버지네 폭설은 늘 술 심부름을 대동하고 찾아왔네
낮술이라도 들이켜야 바다로 가는 길이 열렸네
매섭게 등을 밀던 바람의 발자국 벌겋게 비틀거렸네
인적 끊긴 포구의 홍등 아래 먼데서 닿은 여자들이
칠 벗겨진 손톱 마냥 낡아갈 때
얼굴을 처박은 목선 몇 척 빈 어망으로 흔들거렸네
누구는 또 내일쯤 그곳을 떠나려 벼르고 있겠네

맨 처음 눈이 녹은 자리에서부터 너는 오네
지워진 것들이
일제히 밖으로 쏟아져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은
말할 수 없이 지루하기도 하네
방안에 들인 난분蘭盆 안에
한 촉의 화신이 기미를 보이네
지워진 것들을 건너 오는 이들의 순간 속에는
형형의 色이 깃들어 있네
나는 언덕에 올라가 이미 사라진 것들을 향해
초록의 가슴을 한껏 부풀려 보는 것이네

(그림 : 윤석배 화백)